본문 바로가기
수필 이야기

그저 담담하게 털어놓은 그 남자의 일기장 : 이석원 <보통의 존재>

by Keaton Kim 2019. 3. 24.

 

 

 

그저 담담하게 털어놓은 그 남자의 일기장 : 이석원 <보통의 존재>

 

 

 

나는 손잡는 것을 좋아한다.

모르는 남녀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원나잇 스탠드가 요즘처럼 횡행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이렇게나 따뜻하고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눈물겹다.

잠시 잠깐 만난 사이에서는 결코 손을 잡고 영화를 보거나

거리를 걷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으니까.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처럼 온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누구든 아무하고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하고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잡는 것이 좋다.

 

(p.14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중에서)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만약 지금 내게 누가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살다보면 생기겠죠. 끝까지 안 생길 수도 있겠지만."

 

내 나이 서른여덟.

나는 아직도 생의 의미를 명확하게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여전히 고민한다. 다만 분명한 건 누구나 배우가 되고 감독이 되고 싶어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배우나 감독이 될 자질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 남은 생을 사는 동안, 내가 그저 관객의 안온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한들 꿈이 없다 뭐라 할 수 있을까.

 

청소년들이여, 꿈이 없다고 고민하지 마라.

그럼 관객이 되면 되니까.

그뿐이다.

 

(p.38 '꿈' 중에서)

 

 

 

이 형, 웃긴다. 가수인 주제에 이렇게 글도 잘 쓰고.... 이거 반칙아냐?

 

 

 

라고 생각하며 읽는데, 글이 솔직하다. 솔직하다 못해 궁상맞고 찌질할 정도다. 뜨겁게 사랑했고, 그리고 6년 후 이혼하고(아니, 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라고 물을 수 있으나 살아보면 안다.ㅋㅋ),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력이 있고, 자신을 궁지로 몬 엄마의 이야기와 바깥 세상에 나가기 싫어서 굼지럭거리는 저자의 이야기가 주절주절 적혀 있었다. 영화 평론가 장정일은 호소도, 희망도, 응석도 없는 이석원의 이 글을 읽고 유서 같다고 했는데....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소라 누나' 편에서, 녹화를 기다리며 대기실을 방방마다 돌아다니며 동료 가수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어쩐지 연예인의 혁식적인 인사치레인 것 같아 하지 못하고,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한 소라 누나에게 살가운 문자 한 통 보내는 것도 어려운 이 형. 하지만 혼자 마음 속으로 상대방의 안녕을 바라고 인사한다. 이석원은 이런 유형의 사람이다. 나도 그렇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주 많다. 이런 사람들 말이다.  

 

 

 

이석원은 인디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다. 2000년대 초반에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찾아보면 CD가 어디서 뒹굴고 있을텐데..... 찾기가 귀찮다. 유투브로 예전에 들었던 노래를 지금 다시 들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노래는 맹맹하고 응얼거린다). 그러니까 꽤 오래된 밴드다. (동영상에 나오는 이석원의 얼굴도 오랜만에 보았다. 이 형도 은근 뱀파이어다. 안 늙는다). 이 책도 오래되었다. 초판이 2009년에 나왔다고 쓰여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은 2016년에 발행되었는데, 2판 52쇄다! 헐! 앨범보다 책이 더 많이 팔렸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인갑다.ㅎㅎㅎ

 

 

 

서른여덟 먹은 아저씨의 담담한 일기글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어떤 부분이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렸을까? 희망을 노래하기 보다는, 살아보니 내가 별 거 아니라 그저 보통의 존재더라 라는 독백이 그랬을까? (나도 알고 있다. 내가 그저 보통의 존재라는 걸.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인생은 혼자라는 것도. 쓰고 보니 어쩐지 좀 슬프네~). 그 미묘한 감정선을 잡는게 쉽지 않네. 10년 전 작가의 나이였을 때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긴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관심 있는 분야가 참 다양하다. 주위의 온갖 것들이 글의 주제다. 사람의 기억과 감정에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들이대고 보는 듯 하다. 이 형은 본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살면서 여러 과정을 겪으면서 그렇게 변했을까? 직장, 마누라, 월급, 상사, 자식, 퇴직, 가까운 미래의 내 모습, 뭐 이런 것들이 세계의 모든 것인 범부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일상이 쉽지 않았을텐데 그럴수록 더 쓰기에 몰입했을 것이다. 오감을 활짝 열고 말이다. 마음의 끈을 놓지 않고 지난한 글쓰기를 해온 그가 대단하게 보인다.

 

 

 

'언니네 이발관'은 2017년에 해체했다. 이제 이석원은 가수라기 보다는 작가다. <보통의 존재>를 내고 그 후 몇 권의 책을 더 썼다. 작년 말에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이라는 산문집이 나와서 서점 매대에 꽂혀 있었다. 마흔여덟 살에 쓴 글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나는 보통의 존재 어디에나 흔하지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겨질 수 없었지

가장 보통의 존재 별로 쓸모는 없지

나를 부르는 소리 들려오지 않았지

 

- 언니네 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 가사 중에서 -

 

 

 

이석원의 노래를 들으며 이석원의 책을 읽으면 더 감흥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해보았더니.....

 

노래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책도 눈에 안들어오더라.....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