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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야기

이 아자씨, 역시 여전하시네 : 무라카미 류 <자살보다 SEX>

by Keaton Kim 2019. 2. 7.

 

 

 

이 아자씨, 역시 여전하시네 : 무라카미 류 <자살보다 SEX>

 

 

 

# 1.

 

기억하고 있어? 나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독립해서 싱가포르에 사무실을 열고 공사채 투자로 큰 돈벌이를 해보겠다고. 돈을 많이 벌게 될텐데,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싶어? 라고. 달린저의 창녀 애인처럼 리카도 허풍 치는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똑같은 말을 했지.

 

"그래요, 다시 당신과 춤추고 싶어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쓸께. (p.15)

 

 

 

# 2.

 

그렇다고 못생긴 여자가 팔리지 않고 대량으로 남겨졌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백화점이나 유원지에 가보면 "우와, 심하다!"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못생긴 여자들이 여봐란듯이 결혼해서 남편들과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못생긴 여자와 자는 남자도 있는 것이다.

 

남자에게는 미추에 앞서 우선 자기와 함께 자주는 여자의 유무가 더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p.25)

 

 

 

# 3.

 

오해가 없길 바란다. 그렇기에 사랑이 있는 섹스가 더 뜨겁게 타오른다. 사랑을 구성하는 모든 복잡한 요소들이 한순간에 뒤섞이며 불타기 때문이다. 몸 파는 여자들과 하는 섹스는 사랑이 없다 보니, 적나라하게 알몸을 드러내놓고 해도, 혀로 핥아가며 해도, 왠지 빠져들지 못한다. 단순한 배설일 뿐이다.

 

여자가 친근감, 자기희생, 독점, 소유를 다 잊어버린 채 오로지 절정에 올라 헐떡이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가지려면 그 여자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p.44)

 

 

 

# 4.

 

만약 모든 여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조직의 노동자인 현대판 노예들이 로봇에게 직장을 빼앗기는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틀림없이 일부일처제는 붕괴된다. 그리고 별 볼일 없는 한 남자를 독점하느니 차라리 멋진 남자의 몇 번째 여자가 되는 것이 낫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별 볼일 없는 다수의 남자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겠지.

 

별 볼일 없는 남자라는 것은 정치가나 군인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바로 당신이다. (p.47)

 

 

 

# 5.

 

하반신의 힘이 약해진 남자에게는 내면을 치유하는 전문가의 상담보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을 가진 젊은 여자가 다리를 들어올리며 미소 짓는 것이 훨씬 활기 넘치게 해준다. (p.54)

 

 

 

# 6.

 

"그러니 젊은이들이 절대로 속지 않게 해주세요. 재무성에 들어가도, 미쓰비시 은행에 들어가도, 아니면 세상이 신용할만한 직장이라고 알려진 집단에 속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존경받고, 여성이 따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는 사람이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어른들은 이 이야기를 절대로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아요.

 

사회 시스템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바치는 노예 같은 일생을 보낼 것인지, 비록 사회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어도 충실한 일생을 보낼 것인지, 이 모든 것을 어렸을 때 정해집니다. 이 일본 사회는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거짓말만 계속 되풀이할 겁니다. 그러니 제발 속지 말아주세요."

 

이런 말을 누군가가 쏟아놓기 시작하면, 잔뜩 무거운 짐을 짊어져 짓눌려 있던 아이들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p.131)

 

 

 

# 7.

 

20대 초반에 사회와 자신의 관계를 납득하고 만족해버리는 인간은 바보라는 뜻이다. 그런 무리는 '사회적 행복'만을 머리속에 그린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칭찬받고, 사회가 착한 젊은이라며 받아들여주면 기뻐한다.

 

가장 최악의 인종들이다. 자신의 육체가 느끼는 기쁨보다 사회적인 등급이라 할 수 있는 학벌과 집안, 지위를 우선순위로 설정하는 최악의 인종들. 나는 그런 쓰레기들은 상대하지 않는다. (p.162)

 

 

 

# 8.

 

춤추는 여자는 에로티시즘의 화신과도 같다. 하지만 그건 생식 기능으로서의 에로스, 즉 섹스와는 거리가 멀다. 말하자면 토플리스바 같은 곳에서 만난 여자를 보고, '야, 멋진걸!' 하면서 중얼거리며 반했다가도, 춤추는 모습이 매력적일 때는 왠지 함부로 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바뀐다.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에로틱하지만 범하기 어려운 것..... (p.176)

 

 

 

# 9.

 

지미 코너스가 그처럼 강도 높은 연습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테니스를 좋아해서'이다. 우리는 '싫어하는 일'을 할 때 집중력을 지속해나갈 수가 없다.

 

이 일본이라는 나라는 매우 특수해서 부모나 교사, 선배도, '몇 시간이고 몇십 시간이고 자신의 집중력이 계속되는, 그런 일을 찾아내고 발견해내라'고는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p.182)

 

 

 

# 10.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의 취향을 뚜렷하게 가진 여자가 이제부터는 유리해진다. (p.210)

 

 

 

# 11.

 

연애를 하지 않고도 충실하게 사는 사람만이 충실한 연애를 할 가능성이 있다. (p.223)

 

 

 

# 12.

 

그러니 이제는 설교하는 인간을 신용하지 말아야 한다. ....해야 한다든지, ....이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말은 확실히 모두 거짓말로 치부되어야 한다.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 여자도 대학에 가야 한다. 여자도 좋은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여자는 의지할 수 있는 남자를 찾아 결혼을 하고, 안정된 가정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여자는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것들이 인류의 진리로 정해져 있진 않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p.228)

 

 

 

# 13.

 

불륜을 원하는 주부는 섹스를 하고 싶다기보다는 집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남편 이외의 남자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가 아닐까. 원조 교제를 하는 여고생도 집과 학교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외로운 사람'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그것만을 확실하다. 외롭기 때문에 만남 사이트에 회원 등록을 하는 여자들은 그저 '쓸모없는 여자'로 치부할 수 없는 시대가 찾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p.261)

 

 

 

 

 

 

젊어서 무라카미 류의 책을 읽고 반했다. (그래봐야 몇 권 되진 않지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69 : sixty nine>, <토파즈> 정도 읽었을 것이다. (좀  오래되어 가물~~) 질풍노도의 시기에 훅 들어오는 책이었다. 이 아자씨 참 제멋대로네, 하지만 멋쪄! 라는 감상이 아직 남아있다. (지금 저 책들을 읽으면 재미없을거다. 시기라는 건 분명히 있다.) 그 뒤로는 완전 까먹고 살았다. 오랜만에 그의 책이다. 솔직히 말하면 무라카미 류의 책을 고른게 아니라 제목에 끌려 집었다. 당당하게 SEX라니. 그게 우연히도 그의 책이었다ㅋ.

 

 

 

데뷔해서 2002년까지 여기저기 기고한 연애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부제는 <무라카미 류의 연애, 여성론>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직설적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허를 찌르는 문장도 여전하고. 물론, 새겨들을 말만큼 무슨 소린지 모를 글들도 있었다. 뭐, 그게 '제멋대로' 무라카미 류의 글이지.

 

 

 

제목이 흥미롭다. 세상 사는 게 고단해서, 인간 관계가 힘들어서 궁지에 몰려 정신병을 앓거나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는데, 그 보다는 전화방에 가던지 미팅에 나가 파트너를 찾아 섹스를 하는게 낫다고 한다. 규범을 깨고 자유롭게 살아라는 말이다. 맞다. 근데, 외롭지만 살을 부대끼며 위로할 상대를 찾기 힘든 지금을 살아가는 이에겐 자살만큼이나 섹스도 어렵다. 돈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이봐요 아자씨, 당신은 섹스가 쉬웠는지 몰라도 나는 안그렇다구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