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퇴사했는데요 :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하겠습니다>
행님, 회사 그만두면 아이들하고 형수님하고 생활비는 우짤건데?
나 : .....
그라고 그만두고 나서 뭐 할낀데?
나 : .....
무슨 생각이 있을 거 아이가? 그런 것도 없이 덜컥 그만둔기가?
나 : .....
"사표를 썼습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첫 반응은 역시 '일순 침묵'입니다. 얼굴을 보니 헐~~ 이라는 반응입니다. 왜? 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안됐다는 표정도 잠깐 나오고, 그랬구나 라는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질문을 시작합니다. 누가 괴롭혔는지, 왜 그만두는지, 언제 그만두는지, 그만두고 뭐 할건지를 묻습니다. 일일이 대답하기가 뭐해서 그냥 대충 얼버무립니다.
퇴직을 하려면 회사의 면담(그만두는 마당에 면담은 무슨 면담을....)은 필수라고 해서 본사에 올라갔습니다. 인사담당 팀장(10년도 더 전에 인천대학교를 짓는 현장에서 같이 일했다. 형 동생 하는 사이다)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함께 고생했던 선수끼리 이러지 말자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잡습니다. 말이라도 고마웠습니다. 간 김에 지인들과 한 때 모셨던 상사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본사에 있던 원익이가 멤버를 다 부릅니다. 현장에 있던 재한이와 대원이형이 급히 올라왔습니다. 저녁에 다 모였습니다. 밥숫갈을 뜨기도 전에 재한이가 질문 공세를 합니다. 질문 하나하나가 송곳으로 가슴을 팍팍 찌릅니다. 여태 아무도 저런 당연하지만 아픈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는 싶었는데 차마 물어보지 못한 거겠지요.
"알아. 그만두면 딱히 구체적인 계획도 없고, 한창 돈 많이 들어가는 아이들과 돈 쓰기 좋아하는 마눌의 생활비를 생각하면 아랫배가 답답해져. 그치만, 그걸 생각하면 이 회사, 절대 그만둘 수가 없어. 계속 회사에 묶여서 가야 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일단 한발자국 걸음을 뗀 거야. 일단 발을 내딛는게 중요해. 그 다음 걸음은 첫 발을 떼고 생각하려고." 친한 친구의 물음엔 대충 얼버무려선 안될 것 같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제대로 된 대답을 했습니다. 재한이는 어느 정도 수긍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입니다.
회사가, 회사원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것.
퇴사해도 된다는 것을 아는 것.
퇴사해도 살아갈 수 있는 나를 열심히 준비하는 것.
회사원이 아니어도 사회인.
사회를 지탱하는 사람이 되는 것.
두통 없이, 튼튼한 몸으로,
조금 부족해도 충분히 행복한 것. (책 뒷 표지글 중에서)
운 좋게 좋은 시절을 만나 좋은 학교에, 좋은 회사에, 부족할 것 없는 길을 걸어온 신문 기자가 있습니다. 열심이 일을 했고, 나름 보람도 있었습니다. 아직 젊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깨닫고 보니 중년의 여인이 되었고,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간인지 선별 연령이 되려는 참이었습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 싶어 머리를 뽀글뽀글 볶았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겁니다. 이상한 자신감이 생깁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퇴사를 합니다.
퇴사를 하고 난 후 저자의 목표는 '돈이 없어도 행복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 이 언니 좀 멋집니다. 당장 자신의 생활에서 주변의 물품들을 것들을 차례차례 제거?합니다. 원래는 '있으면 편리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은 '없으면 안되는 것'으로 변한 것들 말이에요. 없어도 살아지고 익숙해지니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이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세웁니다. 전기요금 반으로 줄이기. 무조건 아껴봤지만 별루 신통치 않습니다. 온갖 노력을 해도 안되자 이 언니 발상의 전환을 합니다. 전기가 없다는 전제하에 생활을 하는 것이죠. 밤에 들어오면 바로 불을 켜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몰랐던 여러가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없는 것'의 풍요로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여태 돈으로 사는 즐거움에 갖혀 돈 없어도 즐길 수 있는 행복에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나도 그렇습니다. 이제서야 파란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이 보입니다.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고, 담벼락 사이에 핀 꽃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일 외에는 흐릿했던 시야가 갑자기 라식 수술을 한 것처럼 잘 보이기 시작합니다. 두통도 조금씩 사라졌고, 배가 아픈 것도,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는 증세도 나아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집에서 해먹는 밥도 맛납니다.
하, 이 언니 헤어스퇄, 죽여주는군. 모든 것은이 아프로헤어에서부터 시작되었다ㅋㅋ.
그때껏 나는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을
끝없이 손에 넣는 것이 자유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런 내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였습니다. (p.107)
이 책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과정, 퇴사를 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과 퇴사 후에 미니멀 라이프의 실천 등을 아주 매력적인 필체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더우기 사직서를 내며 겪었던 나의 경험과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문장 하나하나가 아주 입에 쫙쫙 달라붙습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한 라이프 스타일'은 저의 이상향이기도 합니다.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행복말이에요.
좀 다른 점도 있습니다. 라이프 스타일을 소박하게 줄여가는 과정을 담은 글을 읽으며 "당신은 혼자라서 가능하지, 나는 고딩 둘에 중딩 하나, 그리고 미니멀 라이프를 싫어하는 아내도 있다구. 불가능해!" 라고 언니에게 소심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고나서 찬찬히 생각해봅니다. 혼자 사는 중년 백수 여성과 가족이 있는 중년 백수 남성, 어느 쪽이 더 나을까. 각각의 장단점이 있긴 하겠지만, 중년 백수 남성 쪽이 좀 더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가족이 있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더 많구요.
퇴사하는 저에게 아주 피가 되고 살이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어떻게든 된다.'라는 문장에서는 커허, 바로 이거야 라며 물개 박수를 쳤습니다. 서두에서 나왔던 친구 재한이의 물음에 대한 답을 대신해 주었습니다. 아이들 공부를 가르쳐보고 싶고, 어른들 대상으로 외국어도 가르치고 싶고, 건축 관련 강의도 해보고 싶습니다. 요리도 제대로 배워보고 싶고, 서점을 열어 책을 팔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부도 해보고 싶습니다. 이쯤 되면 회사를 그만둔 내 인생도 아프로 헤어의 언니처럼 희망이 가득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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