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근사한 공간에서 아주 근사한 산문을 읽다 : 제수연 <나는 아직 멀었다>
동네에 <지혜의 바다>라고 하는 도서관이 생겼다는 소식을 꽤 오래전에 듣고선 이름이 참 예쁘고 잘 지어서 가봐야지 생각했더랬는데 이제서야 문득 생각이 납니다. 위치를 찾아봅니다. 엉? 주촌초등학교? 헐? 레알? 네, 그렇댑니다. 주촌초등학교가 대단지 아파트 앞으로 이전하고,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도서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구 아이디언지 몰라도 너무 멋집니다.
그리고 저, 주촌국민학교 나왔습니다. 51회 전교 회장 출신이디. 데헷!
그래서 이제는 멋진 이름을 가진 도서관으로 변신한 나의 모교에 설레임을 안고 갔습니다. 도서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했습니다. 이층에 있는 우아한 1인용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가지고 간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 지겨우면 밖으로 나와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렸습니다. 학교 앞 못은 물이 빠져서 좀 앙상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학교 뒷편은 전원 주택지로 깔끔하게 변했습니다. 저쪽엔 종선이, 두선이 형네 집이었는데....
마음 구석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오래된 기억들이 막 떠오릅니다.
몇 해 전인가, 모교가 궁금해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로 여기에 왔더랬다. 큰 강당이 생겼고, 운동장엔 인조 잔디가 깔렸고, 지금은 동네 풍경의 일부분이 된 동남아 형님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그때도 학교 참 많이 변했네 하고 감탄했는데, 지금은 햐~~!!다. 어린 시절 마을 대항으로 편을 나눠 공차기를 하던 그 넓은 운동장은 깔끔한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주차 걱정이 없는 유일한 도서관이지 않을까....ㅎㅎㅎ
내가 다닐 때의 학교 건물을 떠올려 보지만 선명하지가 않네. 다른 건 몰라도 저 충무공은 그 시절의 충무공이겠지.
출입구에 웬 고양이 한마리가 자기 자리인 양 떡하니 서 있다. 다가가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사는 고양인갑다. 도서관 고양이답게 어딘지 모르게 졸린 표정이다.ㅋㅋ
입구를 요렇게 전시해놓았다. 천정에도 책이 있다니, 햐~ 멋진데. 혹시나 하고 책을 빼보려 했더니 안빠진다. 데코레이션이다.
2층 메인 공간으로 올라가니 입이 딱 벌어진다. 그야 말로 책의 바다다. 책이 곧 지혜를 가르키는 말이니 도서관의 이름이 새삼 멋지다. 피아노도 있고 드러눕기 좋은 일인용 소파도 있고. 강당을 개조해서 이런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만들다니. 근데 저 위의 책을 어떻게 꺼내지?
서울에 있는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 하나도 안부럽다. 여기가 훨씬 근사하다구.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네에 이런 도서관이 있다고, 그리고 내 모교라고 막 자랑이 하고 싶어졌다ㅋㅋㅋ.
제사상 앞에서
얼굴도 뵌 적 없는
시아버님 기일이라
조곤조곤히
상을 차린다.
이 세사상을 차린 지도
벌써 스무 해가 넘었다.
돌아가신 분께 죄송하지만
제사에 올리는 음식도
이젠 식구들 먹고 싶은 것이 된지 오래다.
아이들 다 떠나고 나니
남편과 나, 그리고 달랑 시누 한 분
셋이서
얼굴 바라보고 있기가 뭐해
막걸리를 나눈다.
어린 날 만주로 가출을 감행하고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겨우 살아나셨으며
한동안 경찰로 지내시다
남자가 길거리에서 쪼잔하게
호루라기나 불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교통계 발령을 거부하고
기어이 일식 요리사로 지내셨던
우리 시아버님은
기행이 너무 많아
남편조차 따라갈 수 없는데
젊은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상 앞에 앉아 계시니
그보다 더 늙은 아들이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나타나면 담 너머로
고개를 기웃대던 동네 처녀 이야기에
만주 가출에다 학교 수재였던 이야기며
안주를 축내던 옆집 아저씨 집에 불을 낸 이야기까지
너무 않이 들어 마치 살아계신 듯 생생한
시아버님의 이야기를
제사 때마다 듯는 게 싫지 않았다.
너무 일찍 가셔서 아버지와
술 한 잔 못해 본 남편의 넋두리를 듣는 걸 빼면.
부모님 다 돌아가신지
삼십 년이 넘어
은근히 합사를 권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한 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는데
요 며칠 팔다리가 돌아가며 아픈 통에
전 부치는 것까지 힘에 겨워하는 걸
남편은 답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사가 끝나갈 무렵
남편이 아버님 영정에 술을 한 잔 놓으며
"이 밥이 마지막이요"
순간 내가 놀라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합사를 하던지 결정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다른 날, 데른 데로 오시오" 했다.
마지막 밥이란 말에
마음이 짠하다.
영혼인들 편하게 제삿밥 못 먹겠다 싶고
하필 이 시점에 내 팔다리가
고장나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상을 치우면서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사상이라도 거나하게 차렸을텐데
먹을 사람 없다고
이제껏 차린 것 중
제일 초라했는데
그저 미안하고 죄송했다.
마무리하고 들어와 누웠는데
졸음 사이르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다.
혼자 뜨끔해서 속으로 빈다.
영혼으로 오신 아버님!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고
다음엔 어머니와 함께 오세요.
손자 손녀들 다 모아놓고
정성스레 맞이하겠습니다.
부디 평안히.
- 제수연 산문집 <나는 아직 멀었다> 중에서
아이들이 다니는 간디학교 학부모인 벼리 어머니로부터 책이 날아왔습니다. 가끔 까페에 올리는 글을 보고 필력이 어마무시하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책을 내셨습니다. 그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실 책을 내었다는 소식을 듣고 검색을 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아 의아해했는데, 본인이 글 쓰고 편집하고 인쇄하여 책을 만든 겁니다. 큰 아이가 책을 내줬다고 자랑했습니다. 자랑할 만 합니다.
'공상하는 빨간머리앤을 동경하고 풀맛과 단맛이 함께 나는 무화과를 좋아한다. 27년차 특수학교 교사로 소개되지만 바리스타, 김치소믈리에, 아코디언 수강생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즐긴다. 안팎으로 이일 저일 벌이는 것과 대량 제작, 대량 구매 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주특기이고 일상에서의 발견이 배움으로 이어질 때 행복을 느낀다. 기행을 일삼는 남편과 이제는 집을 떠나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4남매 이야기를 재밌게 전하며 오늘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라고 표지에 지은이 제수연에 대해 써놓았습니다.
위의 산문을 읽어보면 척 하고 아시겠지요. 저자의 내공을요. 내가 아는 지은이는 필력 뿐만 아니라 저 몇 줄의 이력으로는 표현이 안되는 생활의 고수이기도 합니다. 제목에서 나는 아직 멀었다고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겸손의 표현입니다. 일상을 대하는 깊이가 있습니다. 책에는 이런 고품격 산문이 책에 가득 실려 있습니다.
위의 글에 나오는 남편도, 그 아이들도 아는 사이라 읽으며 피식거리기도 하고 마음 졸이기도 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주 부럽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내공이 있는 필력이 부러웠고 이렇게 책을 낸 것도 부럽다. 검색해서 나오지도 않고 디자인도 소박한 책이지만 책의 내용은 결코 소박하지 않다. 큰 서점의 매대에 있는 화려한 책보다는 이런 책이 나는 더 정감이 가더라.
저자가 이렇게 직접 글도 써 주시고. 영광이다ㅎㅎ. 독후감을 써서 까페에 올리겠다고 하니, 책을 많이 만들지 않아 간디 학부모에게 다 돌리지 못해서 받지 못한 학부들이 서운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래서 올리지 말아달라는 마음 씀씀이도 참 예쁘다. 가지고 다니면서 조금씩 아껴 읽었다. 술자리 몇 번보다 훨씬 저자와 가까워진 느낌이다.
아주 근사한 공간에서 아주 근사한 산문을 읽었습니다. 도서관을 나오는데 포만감이 한가득입니다. 요즘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TV나 유투브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포만감입니다. 역시 좋은 글이 주는 희열은 다르네요. 책은 가장 오랫동안 검증된 지혜이고 마음의 양식을 채워주는데 최고라는 걸 새삼 실감합니다.
운동장으로 나오니 기분 좋은 바람이 몸을 쓰다듬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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