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이야기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긍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 김훈 <연필로 쓰기>

by 개락당 대표 2020. 3. 2.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긍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 김훈 <연필로 쓰기>

 

 

 

늙어서 슬픈 일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못 견딜 일은 젊어서 저지른 온갖 못된 짓거리와 비루한 삶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 어리석은 짓, 해서는 안 될 짓, 함부로 써낸 글, 너무 빨리 움직인 혓바닥, 몽매한 자만심, 무의미한 싸움들, 지겨운 밥벌이, 계속되는 야근과 야만적 중노동..... 이런 기억이 물고 오는 슬픔은 뉘우침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한恨이나 자책일 뿐이다. 그 쓰라림은 때때로 비수를 지른다. 아아,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가. 그때는 왜 그 잘못을 몰랐던가.

 

 

이보다 더 슬픈 일은 그 악업과 몽매를 상쇄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절벽과 마주선다.

 

 

런 회한과 절벽을 극복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 절벽을 직시하는 힘으로 여생의 시간이 경건해지기를 바란다. '경건'이라고 쓰니까 부끄럽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경건성을 상실한 지가 얼마나 오래인가.

 

 

그러므로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여생의 날들을 온전히 살아나갈 궁리를 하는 쪽이 훨씬 더 실속 있다. (p.73)

 

 

 

 

 

 

1.

요즘 아내와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자주 싸운다(라고 썼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직장 생활로 떨어져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네). 싸우고 나면 주로 내가 삐진다. 토라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 책을 읽으면 어느 정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재의 글이 내게 은근한 위안이 된다.

 

 

2.

아재는 어느새 일흔이 넘은 상노인이 되었다. 머리는 벌써 백발이다. 최근의 사진은 보지 못했으나 얼굴에 주름살도 많이 생겼을 것이다. 내 머리속엔 있는 아재의 모습은 딱 지금 내 나이의 그 모습인데.....

 

 

3.

다 늙은 노인이 세상을 바라본다. 따로 떨어져 있는 두루미 한쌍을 보고 저런 서먹한 금실로 어찌 겨울을 날까 하고 걱정하며, 노인들이 아들과 며느리 흉보는 걸 엿듣고 옮겨 적기도 한다.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져 여자 애인이 남자 애인에게 바짝 매달리는 것을 보는 게 노인의 기쁨이라고도 했으며 자신처럼 늙은 노인 친구들을 저녁 6시에 만나 9시에 헤어지는 후진 송년회도 한다.

 

 

4.

아재의 글에 으례 나오는 이순신의 일화에 그럴 줄 알면서도 눈시울이 빨개졌고, 금강산과 두만강 열차를 타고 여행한 사람 박용래가 두만강 철교를 건너며 한없이 그냥 울었다는 구절에서 나도 울었다. 아무 감정이 없는 비쩍 마른 문장이 사람 울리기는 이전의 글보다 더했다.

 

 

5.

아재는 늙어서 슬픈 일로 젊어서의 못나고 경솔한 일의 기억이라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슬픈 건 이미 늙어서 되돌릴 수도 없고 만회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은 날들을 온전히 살기 위해 궁리하는 게 훨씬 실속있다고 했다.

 

 

6.

내가 못나고 경솔한 일이 그다지 슬프지 않은 건 아직 젊어서일거다. 일흔을 넘은 아재와는 달리 나는 아직 시간이 많다고, 그래서 만회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거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살다 아재의 나이가 되면 나는 아재보다 훨씬 더 슬플거다. 못난 기억이 넘 많아서. 그렇게 되지 말라고 아재는 충고한다. 글로 자신을 벼리며 살아온 상노인의 지혜니 새겨들는게 좋을 거다. 

 

 

7.

언제나 그랬지만, 아재는 당신의 글이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독자의 긍정을 기다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담백함과 무심함이 나는 좋다. 아재는 다만 아재의 글을 쓸고 나는 다만 아재의 글을 읽는다. 아재가 건강해서 내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아재의 글을 읽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