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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야기

네가 나를 밀어내 슬프다. 대신 안아주면 안될까? : 김선희 <내 남자 안아주기>

by Keaton Kim 2020. 3. 29.

 

 

 

네가 나를 밀어내 슬프다. 대신 안아주면 안될까? : 김선희 <내 남자 안아주기>

 

 

 

나 : 들아, 아빠 또 외국에 나갈까?

딸 : 왜여? 일자리가 있어여?

 

 

아내 : 지발 쫌 가라. 인자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

나 : 니 그럴 줄 알았다. 니가 그래서 더 집에 딱 붙어 있을끼다.

 

 

아내 : 돈 벌러 안가나. 인제 출근 쫌 하지.

나 : 집에서 노니까 좋은데 왜.

 

 

아내 : 쫌 나가라. 그리고 안 들어와도 된다. 양육비만 부치고.

나 : 고렇게는 못하지.

 

 

아내 : 그라먼 내가 가출 할란다.

나 : 어이구, 네, 잘 가시오.

 

 

아내 : 가출하면 어째 되는지 아나?

나 : 우째 되는데? 집에 안들어오나?

 

 

아내 : 당연하지. 내 찾을 생각 마라.

나 : 안 찾는다. 걱정 마라. 그라믄 나도 해방이다.

 

 

아내 : 그래. 그라자. 나도 다른 남자 만나서 인생 한번 바꿔 살란다.

나 : 아이고. 들아. 인자 너거 성이 바뀌겠다야.

 

 

아내 : 머라카노? 김씨하고 만나믄 되지.

나 : 응? 푸하핰

 

 

 

이렇게나 아내와 붙어 지내는 게 결혼하고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직업이 떠돌이 생활이라 산넘고 물건너 여기저기 다녔더랬다. 그랬는데 지금은 아침에 눈 뜨면 옆에 있고,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한 방에서 TV를 보고, 거실 테이블에서 함께 작업을 한다. 이렇게 착 달라 붙어 있으니 없는 금슬도 싹이 튼다고?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이다.

 

 

 

저녁에 뭘 먹을지 얘기하다 목소리를 높이고, 산책을 간다 안간다 실랑이하고, 말 거는데 대꾸를 안해서 삐진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으니 사소한 문제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서로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말도 툭툭 뱉는다. 그러니 상대방이 점점 밉상이 된다. 이쁜 구석이 없으니 약간의 모서리에도 찔리고 상처를 입는다. 

 

 

 

부부 사이에서 토로되는 '우린 맞지 않아요, 성격차이에요.' 라는 표현은 알고 보면 '내가 관계 안에서 좌절했다. 네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의미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어렵다든지, 내가 다가갔는데 상대방이 밀어냈다든지, 내 제안을 배우자가 거절했다든지, 배우자에게 화가 많이 났을 때, 그런 일이 켜켜이 쌓여 잔뜩 누적되었을 때 우리는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방어적 표현을 끌어다 쓴다. '내가 너를 원한다, 내가 너와의 화합을 원한다, 네가 나를 밀어내 슬프다.'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p.299)

 

 

 

자, 일단 내 입장에서만 생각해보자. 나는 아내에게 어떤 걸 바라나? 이참에 글로 써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잤나?" 하고 물어주기. 산책 가자고 하면 "그래, 가자." 하고 흔쾌히 가기. 책 읽고 있으면 "무슨 책 읽어?" 하며 말 걸어주기. 술 먹고 새벽에 들어오면 "나 너무 안 늦었지?" 라고 말하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안아주기. 아이들이랑 밥 잘 차려 먹고 청소 깨끗히 해 놓으면 "참 잘했어요." 라고 칭찬하기. 아침을 차려주고 커피까지 내려 대령하면 "여보, 잘 먹을께. 고마워." 라고 말해주기. 가끔 내가 아내 살을 만지면 "싫다고. 저리 가라고." 하며 밀어내기 않기.

 

 

 

음..... 써놓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네. 이 정도 해주면 아내가 참 예쁠텐데. 자, 그럼 입장을 바꿔서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하고 있나?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잤어?" 하고 인사 하나? 아내가 도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이건 무슨 그림이야? 참 예쁘네." 하고 칭찬하나? 공방에서 일하고 늦게 들어오면 "오늘 힘들었지. 다리 마사지 해줄까?" 라고 얘기하나?

 

 

 

안한다. 안하는데, 지가 나한테 안하니까 나도 안하는 거다. 이렇게 우기고 싶은데, 아내도 꼭 마찬가지일 거다. 누가 먼저 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지.

 

 

 

 

 

 

상처를 받고(주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다. 화가 나거나 자책 모드다. 그러면 내 생활이 안된다. 즐겁고 알차게 보내도 아까운 이 봄날을 화가 난 상태로, 아니면 침울한 상태로 아무렇게나 보낸다. 이건 아주 아주 좋지 않다. 상처를 주고 받는 상대가 오직 아내뿐(예전에는 직장의 또라이들이 담당했다)이다. 그니까 아내의 말이나 행동에 내가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약간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아내의 말처럼 자기를 좀 놔둬라고.

 

 

 

남자를 놓아주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독립적인 여자여야 하지 않을까. '타인은 필요 없다. 혼자 살 수 있다.'와 같이 배타적인 개념이 결코 아니다. 심리적 독립이란 좋은 관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진정한 심리적 독립이란 타인에게 적절히 기대고 의지하면서 함께 기뻐하되, 내 삶은 내가 꾸려간다는 주인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다. (p.220)

 

 

 

그래, 내가 꼭 해야 하는 일, 진짜 즐거워서 하는 일, 아내에게 생색을 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일을 만들면 아내의 영향에서 조금 벗어나 자기의 삶을 살면서 서로 적절히 기대는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상대방이 봐 주기를 바라지 않고. 그리고 위에 썼던, 내가 아내에게 바라는 일은 아내도 나에게 바라는 일이다. 누가 먼저 하는지 눈치 볼 필요가 없다. 그냥 하면 되는 거다.

 

 

 

이 책은 여자가 남자를 안아주는 이야기다. 나는 집에서 주부 생활을 하고 아내가 밖으로 돌기에 책 내용에 나오는 역할의 반대로 읽었다. (사실 아내가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거실 테이블 한 중간에 떡하니 두었으나 눈길 한번 안주더라....) 그리고 꼭 여자가 먼저 안아줘야 돼? 남자가 안아주면 안돼? 뭐, 여자가 남자를 안아주든, 남자가 여자를 안아주든, 상황이 되는 사람이 안아주면 된다. 좀 맘에 안들더라도 밀어내지 말고.

 

 

 

그러니 당장에라도 아내를 안아주자. 나는 안아주는 거 무척 좋아한다. 근데 그게 쉽게 되겠니? 근처에만 가도 "미친 거 아이가. 와 이래 쌋노? 저리 안가나!"는 아내의 빽~ 하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