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 하고 살아도 모자란 날들 : 강창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눈을 뜬다. 조용하다. 냉장고를 열어 매실물 한잔 마신다. 정신이 좀 든다. 방방마다 문을 열어본다. 큰넘은 반듯하게 잔다. 이불도 목까지 덥고서. 딸아이는 지 방 구석에 웅크리고 잔다. 분명 가운데서 잤을 텐데. 크고 예쁜 고양이다. 막내는 엄마와 엉켜서 자고 있다.
냉장고를 연다. 홈쇼핑에서 주문한 오징어가 있다. 오늘 아점은 오징어 볶음이다. 냉동된 오징어 두 마리를 흐르는 물에 녹이고 먹기 좋게 썬다. 껍질을 벗기면 더 부드럽다고 하나 귀찮다. 양념장을 만든다. 고추장, 고추가루, 땡초, 마늘, 설탕, 간장, 맛술, 참기름을 넣고 저어준다. 또 뭐 넣을 거 없나? 먹다 남은 와인과 매실액이 보인다. 마저 넣고 오징어를 투하해서 버무린다. 잠깐 재워둔다.
야채는 일단 파와 양파. 요즘 대파가 싸다. 뜸뿍 썬다. 또 뭐가 있다 뒤적인다. 당근과 파프리카가 있다. 둘 다 아이들이 입에도 대지 않는 거다. 당근만 길게 썰어 놓는다. 이 정도면 오케이.
후라이팬이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양파와 당근을 볶는다. 소금과 후추로 기본 간을 한다. 약간 투명할라치면 재워둔 양념 오징어를 투하한다. 강불에서 덕는다. 대파로 마무리한다. 오징어를 하나 집어들어 입으로 넣는다. 부드럽다. 하지만 매운 맛 뿐이다. 급히 올리고당과 다시다를 넣고 휘휘 젓는다. 다시 하나를 먹어본다. 그런대로 봐줄만하다.
아내와 냉전 중이다. 아내는 모임이 많다. 이틀에 한번은 나가서 술을 마시고 온다. 어제는 밤 아홉시에 나가서 새벽 두시에 들어왔다. 지인이나 친구는 그렇게 만나 놀면서 내가 놀자고 하면 안논다. 마트 갈까? 혼자 가. 산책 갈래? 힘들다. 자전거 타러 갈래? 피곤하다. 공원에나 갈까? 잔다고 대답이 없다.
지가 노는 거는 별 상관 안한다. 하지만 나하고 안놀아주는 건 화가 난다. 그래도 남편인데 지인보다 못하다. 그게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서 말 거는데 대꾸를 안했더니 지도 말을 안한다. 사흘째다. 하지만 아침은 꼬박꼬박 차린다. 밉긴 하지만 나도 먹어야 하고, 화나는 거랑 밥 먹는 거랑은 다른 일이기에.
아이들을 깨운다. 일어나. 밥 먹어. 아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 식탁에 앉는다. 딸아이가 부시시하며 오고 막내가 눈을 비비며 식탁으로 온다. 큰넘은 맨 마지막이다. 오징어볶음에 깨까지 뿌렸더만 비주얼이 괜찮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화기애애하게 먹는....거는 없다. 그냥 다들 말없이 먹는다. 막내가 맛있네를 연발한다.
순식간에 야채만 남았다. 나는 당근 몇 점과 오징어 두 점을 먹었다. 양육강식의 세계다. 설겆이는 항상 가위바위보다. 단판이다. 첫판에서 아내와 딸이 이겨 야호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큰넘과 막내와 내가 다시 한다. 큰넘 당첨. 막내도 야호 하며 들어갔고 큰넘은 입이 나왔다.
사진 출처 : http://ch.yes24.com/Article/View/35905?Ccode=000_008_001
말기암 아내가 부엌일을 못하게 되자 남편에게 매일 먹을 음식을 부탁한다.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라면이 전부고 채소를 씻는다는 행동이 어떤 건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남편이다. 그런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과일을 골라 갈고, 파와 양파를 썰고, 육수를 우려내고 무생채를 만든다.
하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글로 써두자. 처음엔 메모에 가까운 레시피다. 간단하다. 조금씩 변한다. 요리 솜씨가 늘어나는 만큼 글도 늘어났다. 요리를 하면서 배운 점과 느낀 점, 왜 이 요리를 하게 되었는지도. 그렇게 모아둔 글이 이 책이다.
그동안 간호한다고 고생 많았어. 당신이 해준 밥을 이렇게 오래 먹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고, 맛있을 거라고는 더욱더. 내가 없어도 밥은 제대로 해먹겠다 싶어서 마음은 편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지금부터는 첫째 동생이 먹을거리를 다 해줄 거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면 간병인을 쓸 거니까, 당신과 아들은 그냥 들러주기만 하면 돼. 보고 싶긴 할 테니까. 그걸로 충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 전에 스웨덴에서 둘째 동생이 올거야. 걔가 반달 정도 딱 붙어서 간호해줄 거야.
그 반달 정도 시간을 줄 테니까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줘.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살 건지 알고 싶어. 당신이 가장 잘 하는 일,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시작해. 이제 더이상 거칠 게 없을 테니까. 죽기 전에 당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건지 분명한 그림을 보고 싶어. 행복한 상상을 하며 죽을 수 있게 해줘. (p.17)
글이 맵다. 고추가 들어 있나 하고 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뭐가 들어가서 매운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은근히 맵다. 아내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순수하게 음식을 만드는 글에서도 매운 내가 난다.
아내를 위해 여러 음식을 만드는 글이다. 아내도 가끔 등장한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이 소화가 안되는 글이 나온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밥은 잘 먹냐고 묻는다. 어제는 뭘 먹었고 그제는 뭘 먹었고..... 저자는 횡설수설 한다. 아, 아내가 떠나갔구나.
아내의 죽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슬픔을 내뱉지도 않는다. 담백하게 넘어간다. 마치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터치의 타츠야처럼. 하지만 슬프다. 의사에게 뭘 먹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양파를 까는 것처럼 눈이 매웠다.
병든 아내를 위해 음식을 만들다보니 어느듯 부엌에 서 있는 저자는 편안함을 느낀다. 자연스럽고 습관이 되었다. 이러려고 아내가 그토록 까탈스럽게 굴었는지 묻는다.
아픈 아내를 위해 요리하는 저자와 미운 아내를 위해 밥을 짓는 나. 그는 요리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때론 행복하기도 하고 때론 슬프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글에서는 사랑이 묻어난다.
밖엔 벚꽃이 벌써 하얗다. 봄이 선뜻 와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서로 날을 세워서 머하나. 즐겁고 재미나게 지내며 사랑만 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인데.
소고기를 좀 샀다. 아내는 갈비살을 좋아한다. 마침 다 떨어져서 제비추리와 업진살을 샀다. 오랜만에 소고기를 먹자고 하니 아내는 된장을 끓인단다. 양파와 대파, 마늘을 굽는다. 소고기의 육즙이 터진다. 갓 지은 밥에 뜨거운 된장국, 만찬이다.
밥을 먹으며 아내가 수다를 떤다. 나는 가만히 들으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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