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지 않으면 그냥 방송 건달일 뿐이다 :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지인 : 허지웅 글 읽어 봤어?
나 : 아니. TV에 나오는 그 친구 별로던데. 쫌 이상해.
지인 : 아냐. 시간내서 함 읽어봐. 글은 완전 다른 모습이야.
나 : 그래? 그렇단 말이지.
몇 해 전에 함께 공부 모임을 하던 지인이 허지웅의 글을 추천했습니다. 당시 허지웅은 어느 TV 프로그램에 나왔는데 딱 봐도 뭔가 삐딱한 녀석이었습니다. 냉소적이고, 결벽증도 있는 것 같고. 보기에 별로였습니다. '젊은 녀석이 참 독특하네' 뭐, 그 정도.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말하는대로> 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영화 <록키>를 소개했습니다. 경기 전날 록키는 애인인 아드리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시합에서 져도,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어.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아무도 거기까지 가본 적이 없거든.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거야
<록키>는 세상과 불화하며 답답하게 보낸 서른 살의 한 남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버텨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온전하게 증명해내는 이야기로, 이 영화를 보고 허지웅도 자신의 힘만으로 버티고 살 수 있다면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그의 책이 눈에 띠었습니다. 반사적으로 지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그 지인이랑 연락 안한지도 몇 해가 되었는데, 이런 매카니즘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건지....). 그는 자신을 "방송에 종종 불려나가곤 있지만 글을 쓰지 않으면 건달에 불과합니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건달 아니었어?
글쓰는 사람이라! 그렇군. 그러했었군. 사랑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세상의 꼰대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그가 생각한 방법은 영화 <록키>처럼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글쓰기였습니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넌덜머리가 나고 억울해서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마다
그 문장을 소리내어 입 밖으로 발음해보며
끝까지 버팁시다.
저는 끝까지 버티며
계속해서 지겹도록 쓰겠습니다.
여러분의 화두는 무엇입니까.
모두들, 부디 끝까지 버티어내시길. (p.371)
방송인 허지웅이 아닌 글쓰는 사람 허지웅은 아주 쪼금 멋졌습니다. 책 속의 그는 까칠했지만 줏대가 있었고, 냉소적이지만 솔직했습니다.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글은 솔직한 글이 아니라는 그의 말이 와닿았습니다. 성공이나 이기는 게 아니라 끝까지 버텨 남 보기에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나 자신에게 창피한 사람이 되지 말자는 그의 일갈은 꽤 쿨~~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라는 프로그램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봅니다. 키보드 칠 힘만 있으면 끝까지 쓰겠다고 말하며, 시간이 지난 후 만약에 하나마나한 위로 같은 이야기들, 이상한 말과 글로 나이 들어가는 걸 본다면 자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라고 합니다. 끝까지 버텨서 자기의 글을 쓰겠다는 허지웅, 여전히 호감가지 않는 밉상이지만, 글쓰는 허지웅을 응원합니다.
그래요. 당신의 글에 힘입어 나도 버텨보겠습니다. 버텨서 내 글을 써보렵니다. 나야말로 글을 쓰지 않으면 쓰잘데기 없고 걸리적거리는 중년의 가장에 불과하니까요. 그리고 허지웅씨, 혹시나 진중권처럼 변하면 바로 뒤통수를 후려갈길테니 그리 아시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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