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거나 나같이 솔로와 다름없는 이는 읽지 마라 : 장강명 <5년 만에 신혼여행>
아아, 좀 비키세요.
니가, 어, 이런 거 봐도 되는 나이가?
아아, 이거 제일 중요한 장면이란 말이에요.
니 열여덟 살 아이가.
아, 진짜. 방해하지 마세요. 아, 방해하지 말라고요~
안된다. 이거 보믄 안된다. 열여덟은 안된다~~~
아쒸, 오십 살 아빠! 쫌!!
안된다. 훌랄라~~ 안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익순이와 준완이가 뽀뽀하는 장면에서 내가 테레비를 막아선다. 딸은 뒤에서 아쒸~를 연발하며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춤을 추며 더 막는다. 장면이 지나가고 딸은 무지 아쉬워한다.
들이야, 엄마 아빠도 옛날엔 저랬다.
흐으으~~
근데 결혼 19년이 되면 이래 된다.
좀 잘하지 그랬어요?
잘했으니까 엄마랑 결혼했지.
말고요, 결혼하고 나서요.
결혼하고 나서도 잘한다고 했는데, 엄마는 그리 생각 안하는 갑다.
그러니까 아빠 혼자 두고 맨날 놀러가지요.
그러게, 이제 들이도 학교 가면 아빤 누구랑 노노?
엄마랑 노세요.
엄마는 아빠랑 안놀아준다 아이가.
아이, 몰라요. 잘 해보세요.
아내는 또 어디론가 놀러 나가고 혼자 있는데 외출 나갔던 딸이 돌아와서 놀아준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도 애틋한 사랑을 했는데,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제 아내는 나랑 노는 것보다 밖에서 남이랑 노는 걸 훨씬 재미있어 한다. 딸의 말처럼 그동안 내가 결혼 생활을 잘못해서 이런 건지, 아님 이 나이가 되면 자연스러운 이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실이 그렇고, 그 현실에 나는 슬프다.
1.
TV를 이리저리 돌렸는데 EBS에 어떤 남자가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써라, 반성하고 교육하는 글은 좋지 않다, 누구나가 말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근데, 담담하게 말하는게 뭔가 진실되고 가식이 없어 보였다. 자신을 장강명이라 했다. 소설가 장강명? 맞다. 호기심이 생겼다. 책방으로 달려가 그의 책을 샀다.
2.
아니, 아무리 에세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써도 되나. 책에 나온 작가는 독특하다고 할지, 대단하다고 할지, 암튼 그랬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결심이 무뎌질까봐 바로 정관수술을 해버린다. 결단력 수준 보소.
아내와 부모의 관계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그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의 궁합은 매우 안 좋다. 성격은 비슷하고 가치관이 다르다. 최악의 조합이다.' 라고 썼다. 난줄 알았다ㅋㅋ. 그래서 작가가 선택한 해결 방법은 아내와 부모를 안보게 하는 거였다. 아내와 부모 사이에서 신경쓰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집중해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감정 상태로 생활하기 위해서라고. 그래야 아내도 부모도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오호라. 그래, 그렇지! 근데 이게 말이 쉽지, 진짜 쉽겠냐고.
곰곰히 곱씹어 보니 맞다. 맞는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우선이다. 내가 최상의 컨디션이 되어야 다른 이도 사랑할 수 있다. 내가 그런 갈등에 굴만 파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이를 보듬을 수 있나. 이 냥반 보통내기가 아니다.
3.
제목에서 알 수 있듯, 3박 5일의 짧은 신혼 여행기다. 근데 이걸로 책 한 권을 뚝딱 만들어냈다. 하, 글쟁이 맞네. 이 책, 오글거린다. 솔로거나 나같이 솔로와 다름없는 이에겐 염장지르는 책이다.
4.
보라카이에 가려는 이에겐 꽤나 유용하다. 이 부부가 좌충우돌하면서 보라카이를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꽤 재미있는 보라카이 안내서다. 뭐, 갈 일이 있겠냐마는.
5.
꽁냥꽁냥하는 모습에 아픈 배를 쓰다듬어 가면서 읽었다. 그래, 신혼여행이니 깨가 쏟아지지. 나도 그랬다. 그랬는데, 너거도 결혼하고 19년쯤 지나봐라. 내가 꼭 두고 볼끼다, 장강명..... 나같은 독자가 이렇게 이를 갈 줄 알고 작가는 바리케이트를 쳤다.
앞으로 우리 부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런 에세이를 써놓은 주제에, 내가 술에 취해 바람을 피우게 될지도 모르고, HJ가 운명적인 사랑을 발견해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마 이 책은 결혼과 사랑과 믿음에 대한 지독한 아이러니의 사례가 되겠지. 나는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HJ와 3박 5일로 보라카이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훼손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이야기 속에서 행복하고, 결말은 '너무 좋았다'이다. (p.245)
역시 작가란 인간은 대단하다. 그래 맞다. 그 옛날에 아내와 나도 '너무 좋았다'가 본질이다. 지금이 어떻다 해도 그 본질은 영원히 훼손되지 않고 부정할 수도 없다(가끔 아내는 어이구, 내가 미쳤지.... 하면서 부정하기도 한다). 다만 지금도 좋으면 그 옛날의 추억은 더 아름다워질텐데. 그나저나 진짜 들이도 학교에 가버리고 나면 나는 누구랑 놀지? 고양이라도 한 마리 들여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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