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경계인이 몸의 언어로 쓴 책 : 김민섭 <대리사회>
강태공과 허생의 아내들
강태공은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낚시꾼이다. 낚시터에서의 선문답을 통해 관직을 얻은 그는 폭군 주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고, 제나라의 제후가 되어 화려하게 고향땅을 밟았다. 그는 바늘 없는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 시대를 들어 올렸다. 그러한 스토리텔링에 더해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일화가 있다. 그는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젊은 날의 강태공은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집안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책만 읽었다. 그가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아내는 홀로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큰비가 왔지만 강태공은 여전히 책만 읽었다. 집에 도착한 아내는 마당에 널어둔 곡식이 모두 떠내려간 것을 보았다. 가난한 그들에게 그 곡식이 어떤 의미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강태공의 아내는 결별을 선택한다. 강태공이 만류했지만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집을 나온다.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허생전>의 허생 역시 강태공과 닮았다. <허생전>에서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고 적혀 있다. 아내가 글을 읽어 무엇하느냐며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허생은 "아깝다. 내가 당초 글 읽기로 10년을 기약했는데 이제 겨우 7년인걸....." 하고는 책을 덮는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아는 허생의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강태공의 아내를 '악처'로, 허생의 아내를 철없는 인물로 기억한다. 남편을 끝까지 내조하지 않고 도망쳤고, 배고픔과 같은 사소한 욕구를 이기지 못해 남편의 앞길을 막았다고 비난한다. 말하자면 아내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태공은 아내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제후가 된 자신을 찾아온 아내의 앞에 물 한동이를 쏟아붓고는 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가 얼마나 아내를 원망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부부는/가족은 한 동이의 물을 함께 지고 버티는 존재다. 하지만 강태공도 허생도 물동이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만 버티면 그것을 내려놓게 해주겠다면서 그 역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물이 가득찬 물동이를 홀로 위태롭게 지고 있던 한 여인은, 결국 그것을 놓아버렸다. 물을 쏟은 책임은 우선 자신의 역할을 외면한 이들에게 있다. 그러나 강태공은 스스로 돌아보는 대신 아내를 원망했다. 허생 역시 아내에게 7년 동안 홀로 물동이를 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아내에게 자신의 '대리인간'이 되기를 강요했다.
<중략>
지난 7월부터 당신의 권유에 따라 파주에 6평짜리 작업실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는 분의 후의로 망원역 근처에 글을 쓸 공간을 얻어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당신과 아이와는 떨어져 지낸다. 대학에 있을 때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다. 다시 한번 내 역할에서 도망쳐 나왔다. 글쓰기와 대리운전으로 번 돈을 꼬박 생활비로 부치고는 있지만, 그것은 내가 맡아야 할 여러 역할 중 일부이고 가장 간편한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강태공처럼 한 시대를 들어 올리거나 허생처럼 국가를 움직일 만한 자신이 없다. '대리사회'가 어떠한 의미를 가진 책이 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대리사회'라는 글을 쓰는 한 사람의 빈자리를 대리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역설에 고마움보다는 미안함이 크다. 고작 그것이 나를 대신해 물동이를 바치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염치다.
삶의 무게는 힘겹지만, 그 누구도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당신도 잘 버텨내기를 바란다. 어서 돌아가 물동이의 무거운 부분을 내가 받치고 싶다. 서로를 삶의 주체로 두는 가운데 글쓰기도 그 무엇도 계속해 나가고 싶다. (p.149~153)
저자 김민섭이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라는 글을 쓰고는 8년 동안 조교와 시간강사로 자신의 청춘을 바친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스스로 걸어나왔다. 그는 한 아내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였다. 생활비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와 같이 많이 배운 이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택한 직업이 대리운전이다.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글쓰기 말고는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택했지만, 애초부터 소위 먹물인 그에게 맞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리운전을 하지만 단지 운전만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대리운전을 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기록하고 글로 옮겼다. 책에는 생활의 고단함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럼에도 글쓰기의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 커녕 아내 그리고 아이와 따로 떨어져 작업실을 구할 만큼 오히려 더 절실했다. 그는 대리하는 인간이기도 했지만 본질은 글 쓰는 인간이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는 309동 1201호다. 자신의 이름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삐딱한? 시선 덕분이다. 그 삐딱함이 이 책에서도 빛난다. 강태공과 허생의 아내를 바라보는 관점은 놀랍기만 하다. 사회의 주류로 사는 사람들은 저런 시선을 결코 가질 수 없으며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왠만한 내공으로는 저런 관점이 나올 수 없다. 자신이 두 발로 서있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가 말하는 대리사회에서 스스로의 주체를 정확하게 세워야 세상을 뒤집어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리사회'가 모두 옳은지는 곱씹어 볼 일이다. 주체로 사유하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말도 들어봐야 하고, 대리사회에서 대리하게 하는 주류들의 변명도 들어보고 싶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내가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그의 질문은 아주 유의미하다. 스스로 온전한 인간으로서 상대방 또한 온전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 그가 책 속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르포르타주이지만, 비장하거나 서슬 퍼른 비난은 전혀 없다. 대신 작가 개인의 성찰과 솔직함이 뚝뚝 묻어난다. 노동과 가족, 소외와 통제 갑과 을 같은 쉽지 않은 주제를 담담하게 유쾌하게 때로는 싱겁게 이야기한다. 읽자마자 그의 선량한 문체 속으로 빠져든다.
그가 대리운전을 하면서 좀 더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한 지인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가 "저한테 왜 이리 잘해 주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저는 당신이 잘 되면 좋겠습니다. 그뿐이에요." 라고 답했다. 내 마음도 그렇다. 자신의 청춘을 모두 바친 대학에서 상처투성이로 사회에 나와, 어느듯 자발적 경계인으로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가 있는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그는 벌써 이 시대에 필요한 지식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밥벌이가, 그의 글쓰기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인간 김민섭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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