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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야기

온몸이 귀어 되어야 겨우 들리는 아득한 말들 : 은유 <폭력과 존엄 사이>

by 개락당 대표 2017. 12. 23.

 

 

 

온몸이 귀어 되어야 겨우 들리는 아득한 말들 : 은유 <폭력과 존엄 사이>

 

 

 

간첩 조작 사건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이 분이 생각납니다. 그 이름도 찬란한 기춘대원군 김.기.춘. 이 분은 1960년 대학교 3학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합니다. 서울과 부산에서 검사 생활을 하시다 1971년 법무부로 오십니다. 이 때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합니다. 중앙정보부에 있을 땐 육영수 여사를 쏜 문세광의 자백(사실 진위는 파악 안됨)을 받아내어 대공수사국장에 오릅니다. 서른다섯살에 중정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 책임자가 된 겁니다.

 

 

 

김기춘 대공수사국장의 대표작은 1975년 '학원 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입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무차별 간첩으로 만듭니다. 김효순 선생이 쓴 <조국이 버린 사람들>이란 책에서도 구체적으로 나오고, 얼마전 MBC 사장으로 간 최승호 PD의 영화 <자백>에서 주요하게 다뤘던 사건입니다. 최PD의 질문에 김기춘은 물론 "기억나지 않는다."로 답했습니다.

 

 

 

노태우 정권 시절엔 검찰총장이 되어 "좌경 세력은 무좀" 운운하며 공안 사범은 무조건 잡아들입니다. '민주화 운동 최대 탄압자'가 되신 거죠. 그 뒤 법무부 장관이 되십니다.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조작하지요. 노동자와 대학생의 분신이 줄을 잇습니다. 우리가 남이가의 초원 복집 사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을 접수하신 분도 바로 이 분이시구요, 세월호 당일 대통령이 어디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한 분도 이 분입니다. 비서실장인데 말이죠. 정말 우리 현대사를 주물럭거린, 대원군이라 칭할 만 한 분입니다.

 

 

 

 

그 김기춘의 말로가 위의 사진이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정말 궁금하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유죄라고 했다. 김기춘도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대원군이라 불릴 만큼의 권력을 지녔을때도, 영어의 몸이 된 지금도.

 

경남고와 서울대를 나온, 대학교 때 사법 시험에 합격한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그랬을까?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진 일인지 한번 쯤 생각해 본 적이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한 일로 어떤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고통을 받는지,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 말이다. 우병우, 김진태, 조윤선 등과 같은 사람들도 모두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들인데.... 정말 아이러니하다. 한나 아렌트의 저 말이 절실하게 와 닿는다.

 

사진 출처 :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97706

김기춘 약력 글 인용 :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72001.html

 

 

 

 

 

 

그래도 진실은 언제고, 반드시 밝혀진다는 거, 나 그걸 알았네.

 

 

 

<폭력과 존엄 사이>는 70~80년대 간첩 조작 사건에 휘말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7명의 피해자를 작가 은유 선생이 만나서 나누는 인터뷰를 글로 옮긴 책입니다. 간첩 조작이라는 엄청난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책이지만, 간첩이라는 더 엄청난 누명을 쓴 피해자들의 일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입니다. 

 

 

 

"저 억울함을 안고 어떻게 살았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억울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불공정한 일은 어째서 발생하는가. 국가라는 추상적인 실체가 폭군처럼 들이닥칠 때 일상은 어떻게 파괴되는가. 그 폐허 위에서 또 다가오는 하루를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는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하는 힘은 무엇인가. (p.7)

 

 

 

삶에서 현명한 선택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좋은 직업을 택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책을 고르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삶은 스스로 선택한 일보다 선택하지 않은 일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좌우되곤 했다. 어느 날 닥친 느닷없는 사건들, 무작위로 날아온 화살처럼 내 마음을 후벼파는 일들, 그 역경을 대하는 태도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할 관계가 훨씬 중요했다.

 

 

 

이 책에 나오는 어르신들의 긴 삶의 여정을 보면서 여실히 느꼈다. 삶에 닥친 인위적인 폭력 앞에서 그들은 침몰하지 않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다른 세상으로 이동했다. 힘없는 사람을 돕고 생명을 살리는 의사로, 남들의 집을 지어주는 건축가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활동가로 존재를 변신하거나 고향을 지키는 나무 같은 사람,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큰 사람이 되었다. 제아무리 각박한 세상일지라도 존재의 눈물을 알아보는 선한 인연은 어디선가 나타났고 두 손을 잡아주었다. (p.18)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되었습니다. 가해자인 국가는 "그래도 되니까" 조작한 것이고, 피해자는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조작 대상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의 삶은 한순간에 무너져버렸고, 그 일을 조작한 사람들은 중앙의 요직으로 가거나 국회의원이 되는 등 사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전과 같은 생활은 아니었지만, 아니 그 일을 계기로 오히려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한 사람의 인생의 인생을 완성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원래 그처럼 단단한 것일까요? 아니면 책에 나온 그들이 위대한 존재일까요? 그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녀림과 위대함을 함께 느낍니다.

 

 

 

 

배운 사람들 하는 짓 보고 못 배운 걸 한탄하지 않았다. - 김흥수 오음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가는 거예요. 밥은 사 먹으면 돈 드니까 강냉이 먹고. 아니면 건빵 100원 200원짜리 사 먹고 물 마시면 건빵이 물에 불어서 든든해요. 죽자 사자 장사를 했어요. 울기도 많이 울었지. 골목에서도 울고 계단에 앉아서도 울고. 버스 타고 가다가 고개 뒤로 젖히고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있으면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나와요.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니까. 내가 그래서 말하잖아요. 눈물 흘려서 한강수 되고 한숨 쉬어서 동남풍 된다고. (p.128)

 

 

김흥수

 

1977. 9. 30.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인천경찰서 정보2과 대공분실(수사관 이근안)에 체포 및 기소

1978. 4. 08.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에서 무기징역형 선고

1978. 8. 02.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15년 및 자격정지 15년 선고

1978. 11. 14.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형 확정

2011. 11. 25. 서울고등법원 재심 신청

2014. 1. 08. 재심 결정에 검사 항고 (재심 결정에 검사가 항고를 했다고? 미친 거 아냐???)

2014. 3. 31. 대법원 검사의 항고 기각 결정 (재심 재판 진행)

2014. 10. 10. 서울고등법원 무죄 선고 확정

2015. 4. 03. 형사보상 결정

 

사진 출처 : http://www.hankookilbo.com/v/3d7b0252adb544bf82d0ff61aeb8c353

 

 

 

책의 말미에 간첩 조작 사건 무죄 목록이 주르륵 나와 있습니다. 얼핏 봐도 100여 건이 넘습니다. 국가가 함부로 망쳐 놓은 개인의 삶입니다.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을 받았던 조봉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으로 몰려 사형을 받았던 강종헌, 이철, 1997년도의 동아대 자주대오 사건도 무죄를 받았구요, 가장 최근에는 2013년에 유우성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도 무죄를 받았습니다.

 

 

 

70년대 80년대가 아니라 지금도 "그래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무죄를 받은 피해자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가해자들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저 위에 대마왕 김기춘의 최근 사진을 올렸지만, 젊었을 때 그가 저지른 이 악행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도 꼭 벌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의 검사와 고문한 자들, 그리고 재판을 한 판사들도 벌을 받거나 이 일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그래야 옵니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에 대한 책만 쓰시는 줄 알았더만, 이런 좋은 책도 쓰시고. 독자 한 사람으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어느 블로그에서 보니까 잘 안읽힌다고 푸념도 하셨던데.... 점점 좋은 세상이 되어 가고 있고, 이런 책도 점점 많이 읽힐 겁니다. 걱정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