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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이야기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찌질이가 아니다 : 남문희 <전쟁의 역사>

by Keaton Kim 2024. 10. 14.

 

"This Is Spartaaa!"

 

제랄드 버틀러 형님이 빤쭈에 빨간 망토만 걸치고 세상 가오는 혼자 다 잡는 영화에 나오는 명대사다. 스파르타의 최정예 300명이 테르모필레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100만 대군과의 싸움이 주된 내용이다. 주인공은 그리스를 대표하는 영웅 중의 한 명인 스파르타의 레오디나스 왕이다.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300명의 스파르탄과 함께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제대로 한타를 뜨는 장면은 압권이다.

 

근데, 영화에서 페르시아의 군대는 미개한 괴물 집단으로 묘사된다. 더우기 왕인 크세르크세스는 완전 열폭 찌질이로 망가진다. 문득 궁금했다. 진짜 저랬을까? 

 

아케메네스 왕조, 일명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550년부터 330년까지 220년 동안 실제한 이란의 고대 왕조다. 오리엔트 문명 전체를 통일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거대 제국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보다 250년이나 앞선다.) 키루스 2세 대왕 때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일구고 다리우스 1세가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다리우스의 아들이 영화 <300>에 나오는 찌질이 크세르크세스다. 크세르크세스는 제국의 세력을 과시하며 전성기를 누렸고, 200년이 넘게 번영하였으며 나중에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페르시아의 수도는 페르세폴리스다. 페르시아의 폴리스라는 뜻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고국으로 페르세폴리스에 자신의 궁전를 만든다. 대제국 최강 왕의 궁전 답게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답다. 

 

페르시아 전성기의 왕이자 이런 멋진 유적을 만든 왕이 결코 그렇게 찌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유적을 제외하고는 페르시아가 남긴 기록은 없다고 한다. 크세르크세스의 기록은 모두 그리스에 있다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기록했다는 건 승자의 증명이다. 그렇다. 현재 우리가 보는 크세르크세스의 모습은 모두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그리고 미국 사람들이 만든 거다. 

 

 

페르시아인들이 만든 크세르크세스의 부조. 멋지기만 하네. 무려 2500년 전에 만든 거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

 

 

Gate of All Nations, 페르세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 아시리아의 보호신인 라마수가 지키고 있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이란 남부의 파르스에 있는 페르세폴리스는 2천 년 이상 흙먼지와 바람 속에 묻혀있다가 1930년 대대적인 발굴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학적 유적이며 당연히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사진은 페르세폴리스의 사신도.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이 위대한 제국의 후손이 이란이다. 이란과 페르세폴리스는 죽기 전에 가봐야 될 곳 중의 하나다. 될까 싶긴 하지만. 사진 출처 : Freepik

 

 

<전쟁의 역사 1권>은 동서양이 맞붙은 페르시아 전쟁부터 시작한다. 서양 챔피언 그리스와 동양 챔피언 페르시아의 싸움이다. 지금의 이란, 이라크, 터키, 이집트까지 집어 삼킨 페르시아는 탑독, 그리스는 언더독이었다. 삼 세판을 싸웠다. 1차전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가 그리스를 쳐들어갔는데 마라톤 전투에서 대패했다. 2차전은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주인공이었는데, 테르모필레와 살라미스에서 큰 타격을 입고 돌아갔다. 3차전은 플라타이아이에서 페르시아가 졌다.

 

이후 그리스는 번영을 쬐끔 누리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자기가 더 잘났다고 싸웠고(필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의 변방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희대의 영웅 알렉산드로스가 나타나서 유럽을 통일하고,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아프리카와 인도까지 진출해서 알렉산드로스 제국(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한다. 여기까지가 1권의 이야기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싸우고 알렉산드로스가 일방적으로 구타를 시전할 때 동양의 본거지인 중국에서는 여러나라가 생겨서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하며 싸웠는데 춘추전국시대다. <전쟁의 역사 2권>은 중국 역사상 가장 재미있는 바로 이 시기를 그렸고, 3권은 그런 여러나라를 제압하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진시황의 이야기다.

 

 

 

 

승자의 입장에선 한없이 통쾌하고 벅찬 희열을 느꼈겠지만 패자, 배신당한 자, 권력자의 이해득실에 의해 사지로 내몰리는 민초의 입장에서는 전쟁이란 감당할 수 없는 비극었을 겁니다. 이들의 입장, 묻혀 버린 절규들을 외면한다는 건 반쪽짜리 이야기밖에 안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의 역사 내내 이 비극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만화를 그리기 위해 역사 공부를 하면서 느낀점을 밝혔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와 스파르타의 운명은 비슷하다. 강력하고 가혹한 법가식 개혁으로 단기간에 힘을 길러 천하를 통일하지만 바로그 시스템이 통일 뒤 고착돼 버리면서 망국의 길로 갔다. 스파르타도 엄하고 강한 무력 중심을 사회 시스템을 계속 유지한 바람에 사회 전체가 경직됐고 결국 자유롭고 창의적이던 아테네에 패망했다. 승리의 원인과 패배의 원인인 동일한 데에 있다." 탁월한 식견이다. 

 

그림을 꽤나 잘 그렸다. 대충 넘어갈 그림은 고우영 선생님처럼 휘리릭 넘어가고, 자세하게 그려야 될 그림은 권가야 선생님처럼 압도적으로 묘사했다. 전쟁의 기술과 전략, 무기, 그리고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단 서사가 약하고 일반적인 교양 만화가 그렇듯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탓에 재미가 덜하다. 새로 산 책인데 2012년에 발행된 1판 2쇄다. 거의 안팔렸다는 얘기다. 참 안타깝다. 로마 전쟁,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초한 쟁패 등 7권까지 내고 싶다는 작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패배자의 입장을 들어볼 기회도 여기까지다.

 

근데 이 작가의 그림은 더 보고 싶다. 작가가 그린 고구려 장군들의 스펙타클한 활약상은 많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