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
김시민 장군을 주축으로 조선군 3,800명이 일본군 30,000명을 막아낸 전투(1차 진주성 전투). 이 책의 배경이며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이 수성전에서 일본군을 완벽하게 물리친 첫 전투라고 책에 나온다. 책의 부제가 '전라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는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온전히 보호하고 이순신의 수군 전력을 유지시킨 대단히 중요한 전투라 행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개빡친 일본군이 이듬해 6월 10만 대군으로 다시 진주성을 공격한다. 2차 진주성 전투라 불리며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처절한 전투다. (결국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의 피로연에 19살의 논개가 일본군 장수를 안고 강에 뛰어들었다.)
책의 주인공은 김시민 장군과 진주성의 민초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아낸 비범한 힘이 진주성을 지켜냈다고 작가는 썼다.
1년 8개월
작가의 블로그에서 이 그림을 그리는데 3일이 걸렸다고 했다. 스토리 작가가 있음에도 이 책을 완성하는데 1년 8개월이 걸렸다며, 가성비를 따지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작업이라고 썼다. 좀 수월하게 하는 여러 프로그램이 있으나 작가는 묵묵히 그린다. 그게 성정에 맞다고. (그래서 2차 진주성 전투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감히 말하자면 작가의 삶도 그런 것 같다.
화풍畵風
블록버스트 급 전투가 이 만화의 주제인데, 마블 영화나 웹툰 고수처럼 스펙타클하고 마블러스한 신들이 나오지는 않는다. 예를 들자면 적군이 쏜 화살은 왠지 모르게 천천히 날아오는 것 같으며, 총알도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다. 심지어 급박한 순간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본군도 엉금엉금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작가의 화풍은 느림이다. 그렇기에 민초들의 표정, 몸짓이 살아있다. 게다가 일본군의 무사와 하층 병사의 디테일을 보는 재미도 있다.
리얼리티
작업을 하다보니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이런 장면이 있으면 리얼리티가 더 살겠다 싶어 장면을 추가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왜군들은 전국시대 전투에 앞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에이~ 에이~ 오~오~오~"를 외쳤다.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된 이상 반드시 이 장면을 넣어야 했다. 군사들을 향해 "에이~에이~"를 외치는 왜군 장수와 이에 화답하여 "오~오~오~"를 외치는 왜군 병사들. (300쪽 책을 내며 중에서)
일본군이 이랬다는 건 굳이 안 넣어도 될 것 같은데, 기어이 그려서 넣었다.
문장紋章
일본 전국시대의 각 가문은 고유의 문장紋章이 있다. 이 책 70쪽에 쓰시마에서 출항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배에 달린 문장을 찾아보니 쓰시마의 번주 소 가문의 문장이다. 소 요시토시가 임진왜란에 참전했고, 나중에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 다케유키도 요시토시의 후손이다.
작가가 이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릴 줄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쓰시마 다이묘의 문장을 확인하니 놀랍다. 그게 재미나서 전국시대 일본 무장들의 문장 찾기 놀이를 몇 시간 했더랬다.
벅수
책 말미에 '작가가 진주성을 그리며 알게 된 것들'이라는 페이지가 따로 있다. 이 부분이 무척 재미있다. 패랭이 챙 위에 있는 비상시 지혈제로 사용한 두 개의 목화솜, 지휘관이 지휘봉으로 썼던 등채나 왜군 장수의 단선, 일본군의 가장 밑바닥 병사인 아시가루 등, 처음 듣지만 흥미로운 사실들이 나온다. 특히 세병관 뜰 앞에 있는 벅수를 깃발꽂이로 썼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도 역시나 하며 감탄했다.
좀 찾아보니 세병관 복원 현장에서 300년 된 돌벅수(에잇, 벅수 같은 넘 할 때 그 벅수가 맞다)가 나왔고, 깃발꽂이 벅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 조상님들, 아름다움이 뭔지 아신다.
권숯돌
한국에서 방송일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청장년기를 보내며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글로 참여한 작품은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생애를 극화한 <의병장 희순>이 있으며, 글 그림과 함께 참여한 작품은 한국국학진흥원 웹진에 연재한 <선인들의 일기>가 있고, 출판물로는 <문화多양성을 배달해 드립니다> 중 <로자나의 히잡>이 있다. <1592 진주성>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책 날개 글쓴이 소개글)
정용연 작가와의 인연으로 권숯돌 작가를 만났다. 집으로 초대해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인연이라 여겼는데, 그렇게 황망히 가시다니. 권작가님의 재능과 열정이 아쉽기만 하다. '늘 그렇지만 책이 나온 후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은 줄어들지도,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라고 책 말미에 썼다. 작가님의 성정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문장이라 생각한다.
다니구치 지로
고로(마츠시게 유타카) 아저씨가 나오는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는 일본의 만화가다. 이 작가의 만화는 모두 재미있다. 대사가 거의 나오지 않고 산책하는 사람과 풍경만 나오는 <산책>, 기르던 개가 죽는 만화 <개를 기르다>, 가출하는 아버지를 그린 <열네 살>, 그리고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돌아보는 <아버지> 등 어느 하나 거를 것이 없다. 차분하고 느린 연출, 배경의 디테일, 풍경의 섬세함, 사실적이고 정교한 그림, 정확한 고증,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스토리가 이 작가의 작품을 표현하는 단어다.
이 단어는 정용연 작가의 만화를 일컫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와 정용연 작가의 만화는 닮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작가가 들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다니구치 지로라고 부를 만 하다.
정용연 작가가 직접 책을 보내오셨다. 여러 권 사서 독서 모임 지인들에게 돌렸다. 다들 재미있다고 했다. 팬의 입장에서 책이 많이 팔리기를 바라지만, 다양성을 지탱하는 이런 책은 그렇지 못한가 보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기의 길을 묵묵하게 간다. 나는 그게 좋다. 마음을 다해 늘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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