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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이야기

고시엔, 고교 야구 열혈 청춘의 그 정점에서 : 모리타 마사노리 <루키즈>

by Keaton Kim 2024. 9. 15.

 

쇼츠에서 고시엔의 한국 교가를 들은 건 8강이 끝나고였다. 고시엔이 어떤 곳인가. 일본에서 야구 좀 한다는 고등학생들이 그토록 밟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가 아닌가. 지면 바로 짐 싸서 고향으로 가야 하는 살벌한 토너먼트 경기다. 탈락한 학생들이 울면서 고시엔 경기장의 흙을 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슬픈 드라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만 산다는 정신으로 부서져라 몸을 던진다. 그런데 그 꿈의 무대에 한국어 교가를 부르는 학교가 8강까지 올라갔다고?

 

토국제고는 4강에서 아오모리 야마다고등학교에 3대2 짜릿한 역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이긴 팀의 교가를 선수들이 함께 부르는 건 고시엔의 성스러운 의식이다.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 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 이렇게 울려 퍼지는 노래를 또 들었다. 이제는 결승. 상대는 도쿄의 칸토다이이치고등학교다.

 

고시엔은 단순한 고교 야구 경기가 아니다. 특히 여름 고시엔은 작게는 50여개, 많게는 100개가 넘는 지역 예선을 뚫은 한 학교만 출전이 가능하다(인구가 많은 도쿄와 지역이 넓은 홋카이도만 2개교 출전). 이러니 고시엔에 올라온 각 학교는 지역을 대표하는 학교가 되고, 그 동네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가 된다. 마흔여 개 지역 간의 전쟁이자 축제다. 특히 이번 결승은 도쿄와 교토, 이전 수도와 지금 수도 간의 맞대결이라 언론에서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후루타 아츠야가 직접 NHK에 나와서 결승 대진의 포인트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걸 놓칠 수는 없지. 유투브로 생방송을 틀었다. 아슬아슬하다. 점수를 낼 듯 하면서도 못내고 줄 듯 하면서도 버틴다. 9회 절체절명의 만루 위기를 넘긴다. 심장이 쪼그라진다. 0대0에서 이제 연장. 10회 초에 멋진 안타와 희생플라이로 2점 선취. 이제 막기만 하면 된다. 10회말, 아뿔사, 투수 실책으로 무사 만루. 1점을 내줬지만 가까스로 버틴다. 투아웃 만루. 안타 하나면 역전 끝내기 패배. 이 완벽한 드라마의 마지막은 삼진 아웃. 투수는 두 팔을 번쩍 처든다. 모든 야수들이 달려와 안긴다.

 

이 때부터 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대팀과의 인사가 끝나고 교가 제창의 시간. 동해 바다 건너서 가 나오고 교가를 울면서 따라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둑이 터진 것 마냥 눈물이 쏟아졌다. 멈추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눈물이 이렇게나 많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엉엉 울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관련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선수와 감독의 인터뷰, 그리고 열악한 학교 상황, 그 속에서도 순수하고 밝은 학생들의 모습들, 보고 또 봐도 울컥울컥했다. 대부분의 국내 언론에서는 우승을 축하하는 방송을 했지만 일부는 일본이 교토국제고의 우승을 폄하하고 조롱했다며 일본을 비방하는 내용을 다뤘다. 하지만 내가 찾아본 일본의 방송들은 모두 수준 높은 경기였다며 결승에 오른 두 학교의 칭찬 일색이었다.



학교의 교가를 찾아 여러 번 들었다. 이제는 외운다. 옆 나라의 한 고등학교가 야구 우승을 했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다만 결승 경기를 보고 울면서 그들에게 했던 말은 기억에 선명하다. “고맙다.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데, 이겨줘서 정말 고맙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고 포효하는 장면. 이것이 열혈청춘의 정점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이학년 투수인 니시무라 잇키. 3학년 에이스인 나카자키 루이와 더블에이스로 모든 경기를 둘이서 씹어먹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신문

 

이긴 팀에게만 주어지는 교가 제창. 내가 해 준 건 멀리서 그것도 마음 속으로 한 응원밖에 없는데 이런 감동을 주다니, 고맙고 또 고맙다. 감독도 우승 인터뷰에서 똑 같은 말을 했다. 이런 여름을 경험하게 해줘서 선수들이 너무 고맙다고. 사진 출처 : 한겨레 신문

 

 

음, 우승한 날은 하도 울어서 오전 내내 멍했다. 지금 봐도 울컥한다. 고시엔을 무대로 하는 일본의 만화는 아주 많다. <내일의 죠>를 그린 카지와라 잇키의 작품인 <거인의 별>, 오키나와의 장애 학생들이 펼치는 야구 이야기인 <머나먼 갑자원>, 그리고 <메이저>, <다이아몬드 에이스>, <4번타자 왕종훈> 등. 고등학생들이 야구를 한다면 고시엔이 목표니 뗄래야 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의 목표는 고시엔이다. 고시엔 우승이 아니라, 고시엔에 나가는 것이다. 그만큼 고시엔의 검은 흙은 밟는 것 자체가 꿈이다.

 

여러 야구 만화 중에서 원탑은 아디치 미츠루의 작품이 아닐까. 델리 스파이스의 노래 가사 쓸 만한 녀석들은 모두 첫사랑 진행 중으로 유명한 H2, 히로시마의 어느 스나쿠 마담이 가게 이름을 미나미로 지을 만큼 센세이션 했던 터치, 그리고 크로스 게임과 MIX까지(일본에서 최초로 1억부를 돌파한 작가라고).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은 야구 만화이긴 하지만, 사실은 야구라는 탈을 쓴 연애 만화다. 그리고 열혈 청춘의 성장만화고. 

 

 

사실은 히카리를 좋아하는 히로, 히카리의 애인이자 히로의 절친이며 대인배인 히데오, 히로의 소꿉친구이자 히데오의 여친이지만 갈등하는 히카리, 히로를 짝사랑하는 매력적인 하루카. 이 네 명의 연애 만화가 H2이다.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밀당의 줄다리기가 야구보다 훨씬 스릴 넘친다. 사진 출처 : 딴지일보 https://www.ddanzi.com/ddanziNews/1705578

 

 

이번 2024년의 고시엔이 고시엔 구장 100주년 기념이라는데, 헐 그렇게 오래된 야구장이야? 그래서 고시엔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포스터도 만들었다고. 일본의 덕후 기질은 역시. 가운데 홍일점이 터치의 미나미다. 히로인임에도 여기에 등장하시는 본좌의 포스를 보여주신다. 일본의 한 설문조사에서 역대 야구 만화의 최고 인기 캐릭터를 조사했는데, 1위가 터치의 주인공 우에스기 타츠야다. 작품 1위도 터치고. 이 포스터의 인물을 절반 정도라도 안다면 당신은 일본 만화 덕후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아사쿠라 미나미 편

 

 

고시엔의 이 포스터를 보고 긴가민가 했는데, 생각났다. 모리타 마사노리의 루키즈다. 위의 포스터 가운데 여자가 아사쿠라 미나미고, 그 왼쪽 FT 유니폼을 입은 인물이 루키즈의 주인공 열혈 바보 선생인 카와토 코이치고 미나미의 오른쪽이 열혈 불량 학생 아니야다. 작가인 모리타 마사노리의 인기작은 로쿠데나시 블루스로, 한국에서는 비바 블루스로 정식 발매되었다. 테이켄 고등학교에 다니는 마에다 타이손이 주인공이다. 멍청하고 친구 좋아하고 싸움 잘한다. 일본에서 원작을 처음 봤더랬는데, 싸움의 살벌함이 장난이 아니다. 이 정도로 표현한다고? 할만큼 폭력적이고, 단지 폭력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다. 

 

루키즈가 다른 야구 만화와 다른 점은 주인공이 선생님이다. 학생들을 무지 사랑하는 열혈 불량 선생. 이 만화에서도 엄청난 포스의 불량 학생 형님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열혈 교사인 카와토는 이들을 모두 평정해버린다... 는 거는 좀 과장되게 표현했고, 그들과 함께 좌충우돌하면서 고시엔이라는 꿈에 다가간다. 지금 좀 찾아보니 이 만화의 인기가 상당했다고(판매부수가 H2와 비슷). 드라마로도 나왔다. 당시에 책을 사서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다는 기억은 분명하다.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어서 책을 들었는데, 일본어 원서라 몇 페이지 못가 금방 포기한다. 

 

 

오래 전 보수동 헌책방 거리에서 이 만화책을 팔길래 가격 흥정도 안하고 얼른 가져왔다. 일본에서 읽은 기억이 선명해서 그랬을 것이다. 타이손을 비롯하여 도쿄 사천왕이라는 간지 작렬의 주인공들이 나온다. 예전에 폭력성의 수위로 문제가 되었던 그 주인공 만화다.

 

 

책꽂이에 먼지가 가득한 책들을 꺼냈다. 사진을 찍는다고 펼치니 아빠의 덕후 기질이 나왔다고 아이들이 놀린다. 내용을 좀 보려고 펼치니 모두 일본어라 머리가 아프다. 조금 읽다가 덮었다.

 

 

버킷 리스트가 하나 더 생겼다. 니시노미야의 고시엔 야구장에서 열혈 청춘들이 야구 하는 것을 보는 것. 물론 교토국제고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뜨거운 여름 더 뜨거운 드라마가 거기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