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인물연구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김해의 인물을 연구합니다. 역사 속에 숨어 있었던 우리 고장의 인물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해인이 멋진 뿜뿜을 연기했던 김오랑 중령의 흉상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김병곤 열사의 추모 조형물 건립을 주도했습니다. 보도연맹 학살 당시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여 '영남의 쉰들러'라 불리는 최대성 한림 면장의 기념물을 세우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대성 면장은 아내의 큰할아버지입니다. 그 인연으로 아내는 김해인물연구회의 회원으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헌쇠 박중기 선생은 인혁당 사건의 생존자입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가족을 보살피면서 살아오셨고, 그동안 읽고 소장해 온 1,200여 권의 도서를 김해인물연구회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김해인물연구회에서는 이 책을 바탕으로 도서관을 만들기로 하고, 도서관으로 사용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친구 용석이의 집을 소개해줬습니다. 친구의 집이 좋은 뜻에 사용되어 좋고, 인물연구회에서도 그만한 장소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아지트가 사라졌다.
일이 잘 진행되어 서울에서 책을 가지고 오고, 집을 도서관으로 꾸미고, 헌쇠도서관 개관 준비를 했습니다. 아내는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원래의 집을 정리하고, 책을 넣고, 도서관 현판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기념 선물도 제작했습니다. 헌쇠선생님께 드릴 작은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개락당 일도 그렇게 좀 하시지요.
그렇게 해서 12월 1일 어제 개관식을 진행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서 다행이었습니다. 4시 9분에 식이 시작하는 건, 4월 9일이 인혁당 사건의 사형집행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서울에서 헌쇠 선생님이 오셨고, 헌쇠 선생님의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는 윤솔지 감독도 오셨습니다. 김해인물연구회의 사람들과 김해시의원들, 그리고 작은 도서관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와주셨습니다. 막내 강이가 축하 공연도 했습니다.
헌쇠도서관 노규현 관장님께서 헌쇠선생님께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꼭 껴안고 "고맙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책을 주셔서, 유족들을 여태 잘 돌봐주셔서, 그리고 어려운 시대에 어른으로서 잘 살아내주셔서 고맙다고 들렸습니다. 관장님은 눈물을 흘리셨고, 그 장면을 보는 나도 울컥했습니다.
표지에는 여덟 분이 생전에 좋아하셨던 꽃들을 그렸습니다. 봄날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봄이 오면 우리 곁에 살아오시리라 믿습니다. (387쪽 작가의 말 중에서)
박건웅의 <그해 봄>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인혁당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평범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하고,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해버렸습니다. 순식간에 간첩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당시 모습, 재판 과정, 그리고 사건 이후 '간첩' 혹은 '빨갱이'로 몰린 남은 가족들의 아픔을 그렸습니다.
만화의 특이한 점은 등장인물의 눈, 코, 입이 없습니다.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피해자들의 슬픔을 상상할 수 있어서 더 슬펐습니다.
그 시대엔 그랬었지, 다 그런 것 아냐? 라고 시대의 아픔의 한 조각으로 넘기기엔 그 아픔이, 그 고통이, 너무나 큽니다. 책을 읽고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알고서야,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겪었던 헌쇠 선생님을 만나고서야 저도 조금 알게되었습니다. 당신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지금 이 만큼 살게 되었다는 것을요.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여덟 분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봅니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당신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헌쇠 선생님, 잘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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