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술이나 마시다 해골이 되라고 태어났겠냐 : 허영만의 살라망드르
얼마전 '한국 바둑의 전설'이라는 타이틀로 진짜 한국 바둑의 전설들이 나와서 그것도 풀리그로 경기가 진행되는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바둑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둑황제, 전신, 제비, 잉창치배 최초 우승자 '조훈현'
영원한 명인, 진로배 9연승의 신화, 된장바둑 '서봉수'
일본 바둑의 전설, 폭파전문가, 불멸의 본인방 '조치훈'
세계 최고의 공격수, 일지매, 유왕위 '유창혁'
수식어조차 필요없는 그야말로 현대 바둑의 전설, 택이 '이창호'
이 전설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대국이 이루어지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TV앞에 앉았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 그리고 누가 우승하는 가는 그리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들을 대국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볼 수 있는다는 것, 그래서 보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둔다" 는 조치훈. 전성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전치 3개월의 중상에도 "나에겐 머리가 있고, 또 오른손이 있다."며 출전을 강행, 휠체어 대국이라는 전설을 만들어내면서 저 슬로건을 실제로 증명했다. 아주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바둑의 전설이 되고 쭉 일본에 살면서도 한국인의 긍지를 버리지 않는 모습이 멋지다. 최근 드라마 미생에서 나오는 그 유명한 대사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의 주인공이다. 그의 소박하고도 소탈한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바둑을 좋아합니다. 만화는 더 좋아합니다. 그러면 바둑 만화는??!!! 근데 바둑을 소재로 한 만화는 의외로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 발바리의 추억으로 유명한 강철수 작가가 바둑 만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바둑스토리, 新 바둑스토리, 하수의 법칙 등이 바둑을 소재로 한 만화였는데,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일본 만화도 꽤 쏠쏠하게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 살 때 나온 책이라 일본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데헷~~~.
위에서 언급했던 울나라 바둑의 전설들의 실화를 그대로 그린 바둑 삼국지라는 만화도 훌륭하구요, 최근에 메가톤급 폭풍을 몰고 왔던 윤태호 선생의 미생도 역시 바둑을 소재한 만화입니다. 다들 서로 다른 장르라 비교가 안됩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가장 강렬했던 바둑 만화는 바로 이 만화, 허영만 선생의 '살라망드르'입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이 만화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란..... 그것도 거의 완전 새책! 깍자는 말 한마디 안하고 바로 샀다.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강렬하다. 이걸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때 읽었으니, 그 충격이야 말로 말로는 설명 못한다. 허영만 선생의 작품중에 가지고 싶은 작품이 하나 더 있는데 '카멜레온의 시' 라는 만화다. 로뜨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라는 지금 읽어도 이해가 안가는 시집을 이 만화 덕분에 중학굔가 고등학교 시절에 샀다. 언젠가는 구해지겠지.
'미쿡에서 대학을 다니는 할 줄 아는 건 싸움이랑 바둑밖에 없는 개날라리 주인공은 목적없이 그저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운명의 집시 여인을 만나고, 잠깐 행복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얼토당토 안한 사건에 말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 그리고 한국으로 간다. 자신의 뿌리를 찾으러, 삶의 의미를 찾으러. 우여곡절 끝에 인생과 바둑의 스승을 만나 목숨을 걸고 바둑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의 가정을 파탄시킨 절대악을 물리치고,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삶의 목적이었던 프로기사가 되지만, 그는 벌써 그 과정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의 무상함과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는 줄거리입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읽으니 허영만 선생의 어딘가 좀 익숙한 구도입니다. 네, 기억이 났습니다. 바로 타짜 씨리즈입니다. 기본적으로 바둑으로 하는 도박이야기에다 나오는 인물들도 웬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타짜의 모태가 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주인공이 바둑을 통해 삶의 깨달음을 얻어가는 구도자적 성격이 더 강하고 스토리의 힘도 훨씬 폭발적입니다.
19금 만화다. 제법 야한 장면도 더러 나온다. 이런 장면들이 적절히 잘 구성되어 칼 끝 위를 걷는 듯한 일상의 위태로움과 허무함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래서 더 강렬하고 재미있다. 그래도 혹시 중2 아들래미가 볼까 싶어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다 꽂아두었다. 아무리 조숙한 넘이지만 아직은 이르다. 고등학생 정도 되면 권해주고 싶다.
내가 세상에 머하러 태어났겠습니까?! 그냥 술이나 마시다가 해골이 되라고 태어났겠습니까?! 나는 나라는 놈을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단 말입니다!!!
나도 머하러 태어났겠습니까?! 이렇게 졸라 회사에만 다니고 돈이나 벌라고 태어났겠습니까?! 나도 먼가를 이루고 싶다구요! 나도 스스로 증명하고 싶다구요!!
주인공 강희석의 처절의 절규다. 그리고 나의 절규다. 그 후 진짜 목숨을 걸고 바둑 공부를 한다. 오직 하루만 사는 것처럼! 주인공의 곁에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비전 절기를 주인공에게 전수하는 훌룽한 스승이 있다. 그리고 여자도 있다. 바둑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깨우치고, 또 그 바둑으로 나쁜 악당을 물리친다. 모든 것을 잃고, 그리고 모든 것을 얻지만, 그는 이미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릴줄 아는 해탈의 경지에 올랐다.
그림 출처 : http://danbis.net/1240
후련하다. 감동적이다. 재미있다. 강렬하다.
책을 읽고 난 다음의 소감을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이 안되는 나의 글재주가 안타깝습니다. 위의 네마디를 A4 한장 정도로 줄줄 써야 글 좀 쓴다고 할텐데.... 그래서 그냥 읽어보라고, 읽어보면 안다고..... 그저 이 정도의 말 이외에는 더 쓸 말이 없습니다. 허영만 선생의 수많은 만화중에서 감히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강추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십시요!!
PS 1.
사실 이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있기야 하겠지만, 제 주위에서 아직 본 적은 없습니다. 진부하고 평범하고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가 대부분입니다. 서봉수 명인은 환갑이 넘은 요즘 바둑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하신다고 합니다. 그의 전성기는 언제일까요? 바둑 올림픽이라 불리는 잉창치배를 드라마틱하게 우승했을 때? 아니면 조자룡 헌칼 쓰듯 중일의 전설들을 베어버린 진로배 9연승의 신화를 보여줬을 때일까요? 제가 볼 때는 서명인의 전성기는 지금입니다. 진부하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열심히 공부하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바둑 두시는 서명인의 모습, 인터뷰하는 모습, 해설하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괜히 내가 뿌듯했습니다.
PS 2.
글을 적으면서 잠깐 생각해봤습니다. 허영만 선생의 작품중 TOP 5를요. 근데 잠깐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군요.... ㅋㅋㅋ 그래도 한번 꼽아봅니다.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근데 적고 보니 모두 제가 한창 젊고 예민할 때 읽었던 만화군요. 시기가 작품성만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 한강
카멜레온의 시
벽
고독한 기타맨
살라망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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