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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내 주변에도 이데아와 메타포가 존재하나?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by Keaton Kim 2020. 3. 16.

 

 

 

내 주변에도 이데아와 메타포가 존재하나?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1. 

시간이 남는다. 남아도 무지 남는다. 책을 읽는거 말고는 별로 할 일이 없다. 집에 읽지 않은 책은 벌써 다 읽었다. 코로나 땜시 도서관 문을 닫은지 꽤 됐다. 할 수 없지. 서점에 들렀다. 하루키의 책이 나를 째려봤다. 째려보면 어쩔건데? 애써 무시했으나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정 그렇다면야.

 

 

 

2.

긴 족자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미모의 여인이다. 근데 이 미모의 여인이 밤이 되면 그림 밖으로 나온다. 막 돌아다니기도 하고 오지랖 넓게 현실 세계에 관여한다. 그러다 곤경에 빠지게 되는데 어떤 떠꺼머리 총각이 도와준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여인은 아침 닭이 울면 족자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총각이 족자를 불태웠다던가..... 전우치도 비슷한 종류 아냐?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기사단장을 보며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족자 속 미인이야기가 생각났다. 만화였지 싶다.

 

 

 

3.

대단한 흡입력이다. 50페이지를 읽었나 순식간에 100페이지를 돌파하고 돌아보니 한 권을 다 읽었다. 두 권을 합치면 거의 벽돌 수준인데 이틀만에 해치웠다. 일흔을 넘은 작가가 당기는 힘이라니. 노련미와 세련미라는 칼을 현란하게 휘두른다. 압도적이다. 이러니 하루키지.

 

 

 

4.

천정 속 비밀스런 공간에서 나온 이상한 그림, 새벽마다 울리는 방울 소리, 예측이 전혀 안되는 사춘기 소녀, 푸른 수염의 방, 지하 무덤과 같은 돌구덩이, 거대 주택에 혼자 사는 멘시키라는 넘의 정체? 메타포(전문용어로 떡밥)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니 당연하게 책을 손에 놓을 때까지 흥미진진하다.) 그렇게 다 읽고 나니 손에는 빠져나간 모래 부스러기만 남는다. 이것도 역시 하루키다.

 

 

 

5.

주인공은 자신의 일에 전문가고 반복적인 일상을 심플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뭔가 상.실.하게 된다. 그게 뭔지 알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어둠의 세력을 만나 위험에 처하지만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조력자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 그리고 여자도. 이거 뭔가 많이 봤던 시츄에이션 아닌가. 아주 예전에 봤던 무협지나 무협 만화의 내용이 대부분 그러하다. 사람을 빠지게 하는 플롯이다. 이건 현대판 무협 소설이다.

 

 

 

6.

주인공의 곁에는 언제나 미모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여인들과 음양합일신공을 시전한다. 그 신공을 꽤 노골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꼴린다. 하지만 지저분하지 않다. 깔끔하다. 좀 더 길게 가줘 하는 바램이 살짝 무시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깨끗하게 끝낸다. 주인공이 부럽다. 

 

 

 

7.

이 책이 나올 당시 무슨 논란이 있었던 것 같은데. 책의 내용을 곱씹어 보니 아마도 난징대학살의 장면 때문일 것 같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역시나. 일본군이 중국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에 일본 오른쪽 세력들이 씹어댔나 보다. 소설인데 저 정도도 못 써나? 그것도 분명 있었던 일인데. 암튼 하루키는 우파는 아닌 듯 하다. 그렇다고 좌파도 아닌 듯.

 

 

 

8.  

적어도 처음 몇 년은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이에 문제다운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대형 여객선이 바다 한복판에서 키를 돌리는 것처럼 느릿한 전환이 일어났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전환점을 정확히 집어내기도 불가능하다. 아마 그녀가 결혼생활에서 원했던 것과 내가 원했던 것 사이게 어떤 차이가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 괴리가 커졌던 것이리라. (1권 p.482)

 

문득 그녀 더이상 내 아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연결점도 없다. 사회적 계약상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도. 나는 이미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부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몇 달 전만 해도 매일 같이 밥을 먹고 같은 수건과 비누를 쓰고 서로 알몸을 드러내고 침대를 함께 썼는데, 지금은 관계없는 타인이 되어버렸다. (2권 p.204)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헤어지자고 말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래서 이혼하게 되면 새처럼 훨훨 나는 기분일까. 이제 나도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때가 되었구나, 야호! 라고 생각할까? 그럼 집에 있는 책들은 어쩌지? 아내의 물건과 내 물건을 어떻게 나누지? 서로 니가 가져가라고 싸우는 거 아냐? 이런 게 어려워서 이혼 못하는 건가. 그럼 이혼한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원만히 해결했지? 다 떠나서 살을 맞대고 오랫동안 살던 사람이 남이 되는 기분은 어떤걸까? 이건 궁금해지면 안되는 거 아냐? 아, 좀 위험하다.

 

 

 

 

 

 

9.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 책의 소제목이다. 소리내어 읽어도 뜻을 잘 모르겠다. 꼭 이렇게 어려운 말로 제목을 정했어야 했냐!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들은 내 주위에 머무르는 것일게다. 책에도 기사단장으로 현신한 이데아는 주인공 가까이에 있다. 내가 너무 바빠서, 혹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못 알아보고 있을 뿐이다. "기사단장은 정말로 있었어. 믿는 게 좋아."라고 강조하는 마지막 문장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내 주위에 있는 이데아와 메타포를 느끼며 살아라고 읽혔다. 근데 어디있지? 이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