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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연애소설 : 히라노 게이치로 <마티네의 끝에서>

by 개락당 대표 2020. 2. 10.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연애소설 : 히라노 게이치로 <마티네의 끝에서>

 

 

 

 

 

 

들이야 오늘 외할아버지 제사다. 학원 가지 마라.

에이, 오랜만에 학원 가서 춤이나 실컷 출라고 했는데. 알았어. 엄마.

 

 

 

네, 장인 어른 제사입니다. 아이들 데리고 처가집으로 좀 일찍 가라고 아내가 그럽니다. 자기는 오늘 모임이 있어서 좀 늦겠다고 말입니다. 직장에 다닐 땐 멀리 있어서 제사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지금은 백수라 가지 않을 핑계가 전혀 없습니다ㅎㅎㅎ. 저녁 무렵 처가에 가니 동서들도 오고 식구들이 음식 장만에 분주합니다. 

 

 

 

밤 10시쯤에 제사를 모시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아직입니다. 제사가 한창입니다. 아내는 여전히 무소식입니다. 제사가 끝났습니다. 아내는 오지 않았습니다. 처제, 처남, 처형들에 그 배우자까지, 세째딸인 아내 빼고 다 왔는데 말이죠.

 

 

 

나는 학원도 빠지고 왔는데, 어? 엄마 지는 논다고 안오고 어? 이게 말이 되요?

 

 

 

급기야 딸이 한마디 합니다. 그러게 말이다. 다 함께 아주 늦은 저녁을 먹고 동서들이랑 음복을 하고 자정이 넘어 집으로 왔습니다. 아내는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두시가 넘어 아내는 집에 왔습니다. 오랜만에 사위가 제사에 참석했으니 자기는 한번쯤 빠져도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매실 한 잔 타온나

 

 

 

아침에 일어난 아내가 말합니다. 네네. 어제 그렇게 늦게 까지 약주 드시고 오셨으니 목이 당연히 타시겠지요. 그 와중에 "매실 넘 많이 넣지 말고!" 라고 상세 주문까지 하십니다. 관셈보살.... 술 먹고 논다고 자기 아버지 제사도 빠진 아내가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소심한 태클을 날려봅니다.

 

 

 

좋더나? 늦게까지 노니?

내가 논다고 늦게 왔나. 비지니스 한다고 늦었지.

 

즐겁게 놀다왔다고 그냥 얘기해라. 비지니스라고 하면 양심에 가책을 좀 덜 받나?

머라캐싼노! 크르르릉~~~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렵습니다. 이런 아내가 예뻐보일리가 없습니다. 물론 아내도 몇 개월째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제가 예뻐보일리 만무합니다. 대화가 힘들고 어쩌다 좀 이어지게 되면 서로 으르릉거립니다.

 

 

 

크흑! 우리도 한때 뜨거웠습니다. 살결만 닿아도 전기가 찌릿하게 왔습니다. 잠깐 떨어지는 게 싫어 눈물을 보이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결혼 20년 정도 되면 다들 이렇게 산다고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참 슬픕니다. 우린 이제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을까요?  

 

 

 

사진 출처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7475822&memberNo=944136

 

 

 

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연애소설

 

 

 

책꺼풀에 큼지막하게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햐~~ 이건 나보고 하는 말이네! 얼른 집어들었습니다. 주인공은 천재 기타리스트와 프랑스 RFP 통신에 근무하는 여기자입니다. 물론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구요. 이들은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확실한 감정은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죠.

 

 

 

기본적으로 이 두 사람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고, 헤어지고, 각자 결혼을 하고, 하지만 그 사랑을 잊지 못해 다시 만나는 로맨스입니다만, 그 안에 이라크 사태와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 행해졌던 만행, 나가사키 원폭 투하 등의 비극, 뉴욕 월가의 탐욕 등이 주인공들 개인의 역사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좀 묵직합니다.

 

 

 

사진 출처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7475822&memberNo=944136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항상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p.69)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과거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공감합니다. 지난 시절, 나는 참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근데 요즘 백수라는 저의 처지가 길어지면서 저의 과거도 다 보잘것없이 느껴집니다. 하찮은 삶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나의 과거가 빛나려면 현재가 빛나야 된다는 말로 해석했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스물 한 살의 대학생 때 <일식>이라는 첫 장편소설을 써서 일본 문학의 최고의 상인 아쿠타가와상을 탔다고 합니다. 너무 경이로운 등장이라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의 재림이라고도 했다는군요. 아베 정권의 정치 방식과 역사 인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라고 옮긴이가 말해주었습니다.

 

 

 

      <행운의 동전> 연주 : https://youtu.be/1pbuUW03j00

 

 

 

제목을 보고 <마티네>가 어디지? 아니면 무슨 물건인가? 내내 궁금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마키노는 한 호흡 쉬었다가 마지막으로 시선을 1층 안쪽으로 향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럼 오늘 이 마티네의 끝에서 다시 한 가지, 매우 특별한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요코는 그때서야 희미하게 웃음이 감돌던 뺨을 파르르 떨며 숨을 죽였다. 마키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을 위해'라는 말이 사실은 단지 '당신을 위해'라는 뜻이라는 것을 전하려는 듯이 슬쩍 턱을 끄덕인 다음에 의자에 앉았다.

 

마키노는 기타에 손을 얹고 몇 초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예르코 소릿치의 그 유명한 영화의 주제곡, <행운의 동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첫머리이 아르페지오를 들은 순간, 요코의 감정은 억누를길 없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p.482)

 

 

 

마티네는 프랑스어의 '오전 중'이라는 뜻의 '마탱matin'에서 유래한 말로 낮 공연이라고 합니다. 주로 저녁에 이루어지는 공연을 낮 시간이 자유로운 학생들과 주부들도 즐길 수 있게 한 대중적인 공연이라는 말이라네요. 저는 프랑스 어느 끄트머리인줄 알았습니다ㅎㅎ. 

 

 

 

이 소설은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후쿠야마 마사하루 실제 가수입니다. 오래 전 제가 일본에서 생활할 때 이 사람 노래를 자주 들었습니다. 영화만 있는 게 아니라 음반도 있고 공연도 있네요. 소설 속에서 <행운의 동전>을 기타로 쳤다고 나오는데 유투브에 실제로 그 연주가 있었습니다. 헐~ 놀랍습니다. 위의 영화 포스트에 있는 유투브 주소를 클릭하시면 그 아름다운 기타 연주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 글도 그 음악을 들으며 쓰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7475822&memberNo=944136

 

 

 

만나자마자 반해버린다는 환타지 같은 전개지만, 그와는 전혀 다르게 절제와 기품이 있는 작품입니다. 잠깐 홀린 듯 아름다운 세계에 젖어들었습니다. 어른들의 이상적인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만나면 아무 말 없거나 으르릉거리거나 둘 중 하나인 사이가 되어버린 내 반려자도 한 때 가장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으르릉도 사랑의 한 표현라면 뭐, 저 위의 문구가 맞는 말이긴 합니다ㅋㅋㅋ. 

 

 

 

집에 가서 모른 척 하고 아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