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외국)

오늘만 사는 남자 조르바, 그리고 나의 아내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by Keaton Kim 2020. 4. 2.

 

 

 

오늘만 사는 남자 조르바, 그리고 나의 아내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1.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p.17)

 

 

자신를 데리고 가라는 조르바의 요청에 결정을 못하고 머뭇거리니 조르바가 하는 말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달아보고 재보고 하는데 왜 그래야 하나. 조르바는 생각보다 행동이다. 지중해에 사는 사람은 이 햇살 가득한 지금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나중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선다. 내 아내도 그렇다. 

 

 

 

2.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리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리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니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p.24)

 

 

나는 당신에게 고용된 사람이지만, 연주하고 노래할 땐 나의 주인은 나다. 여기서 인간은 곧 자유다. 조르바는 자유 그 자체다. 조르바는 처음 고용 관계가 형성될 때 쐐기를 박는다.

 

 

 

3.

시장하지 않으시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들지 않았어요?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p.54)

 

 

먹을 땐 먹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먹기 시작하면 먹는데 집중해야 한다. 음식의 맛을 최대한 느끼면서 집중해서 먹는다. 다음 일의 걱정으로 먹지 않거나, 먹으면서 걱정하는 것 따위는 조르바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아내도 그렇다. 먹을 땐 일단 맛나게 먹자. 조르바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음식과 포도주 그리고 여자다.

 

 

 

4.

여자란 건강에 해롭고 토라지기 잘하는 동물이랍니다. 누가, 사랑한다, 갖고 싶다고 하면 여자는 웃음을 터뜨립니다. 여자는 당신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여자가 싫다고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여자를 보는 남자는 모두가 여자를 갖고 싶다고 말해야 합니다. 여자란 가엾게도 그걸 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남자라면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여자를 기쁘게 해줘야 하는 겁니다. (p.73)

 

 

여자란 그렇댄다. 여든 먹은 조르바 할머니도 꽃단장을 하고 세레나데를 기다린다. 그렇다면, 아내에게 "당신을 갖고 싶어. 오늘밤엔 특히." 라고 말하면 어떨까? 기뻐할까? 아서라. 욕만 디립다 처먹을 거다. 조르바, 방법을 가르쳐줘.

 

 

 

 

 

 

5.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밎지. 조르바가 딴 것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p.86)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나의 주인은 나다. 내가 죽으면 세상도 함께 죽는다. 그러니 내가 곧 세상이다. 야호!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나의 주인은 내 아내다. 잠 잘때도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6.

그 친구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춤으로 추는 겁니다. 나도 똑같이 했지요. 우리는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발로 손으로 배로, 하이, 하이, 호플라, 호 하이 따위의 장단으로 표현하기로 한 거지요. 우리가 표현한 건 모조리 알아들었어요. (p.116)

 

 

조르바는 기쁜 일이 있을 땐 춤을 춘다. 왜냐고 물으니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춤밖에 없다고. 슬플 땐 울고, 기쁠 땐 기뻐하면서 춤을 추고. 머리보단 몸으로. 에덴동산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 조르바. 조르바의 춤, 안소니 퀸이 추던 그 춤을 나도 따라 추고 싶다.

 

 

 

7.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p.148)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조르바가 묻는다. 당신이 읽은 책에서는 뭐라고 합디까? 몰라요. 조르바는 당신이 읽은 책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확 불이나 싸질러라고 말한다. 내 아내도 집에 있는 책을 갖다 버리던가 팔던가 하잔다. 내가 읽은 책도 진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진짜는 스스로 터득하는 거다. 몸으로 체화된 삶! 조르바처럼 그리고 내 아내처럼.

 

 

 

8.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p.159)

 

 

여행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고 소설가 김영하가 말했다. 계획대로만 가는 여행이 무슨 재민가. 그리고 계획대로만 가는 인생이 무슨 인생인가. 조르바의 말이 백 번 옳다. 하지만 나는 말썽거리를 만들 용기가 부족하고, 그 말썽거리를 헤쳐나갈 지혜도 부족하다. 일 저지르는 건 아내가 참 잘한다. 허리띠도 안 풀고 저지른다.

 

 

 

 

 

 

9.

사람이란 제각기 제멋에 사는 겁니다. 사람이란 나무와 같아요. 당신도, 버찌가 열리지 않는다고 무화과나무와 싸우지는 않겠지요? (p.180)

 

 

들이가 설겆이를 하면서 "엄마한테 엄마가 먹은 거는 설겆이 하라고 하세요!" 한다. 들아. 사과나무한테 복숭아가 안 열린다고 머라 하면 사과나무가 알아들을까? 사과나무한테는 예쁘고 맛난 사과를 만들어줘서 고마워. 넌 정말 멋있어. 앞으로도 더 맛나는 사과 부탁해! 라고 해야 한단다. 들이도 뭔가 오는지 알겠다고 한다.

 

 

 

10.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p.237)

 

 

조르바는 어린 아이처럼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만사가 그에겐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 놀란다. 조르바는 모든 것에 놀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특히 여자에게. 보는 여자마다 다 신비롭다. 매일 눈 뜨면 만나는 아내가 신비로우면 얼마나 좋을까? 조르바의 눈을 사고 싶다.  

 

 

 

11.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p.302)

 

 

버찌가 먹고 싶어서 아버지 주머니를 털어 한 소쿠리를 사서 먹는다. 아주 질릴 때까지. 그렇게 조르바는 정열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술도, 담배도 그렇게 했다. 지배에서 벗어나면 언제든 끊을 수 있다. 조르바가 자유를 얻는 방법이다. 그럼, 여자는? 이라고 묻자 조르바는 일흔이 되면 그럴 거라고 답한다. 그리고 조금 있다 여든으로 바꾼다. 이 할배, 유머도 장난이 아니다.

 

 

 

12.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씌여져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 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p.351)

 

 

나는 대답할 수 있나? 내가 책 속에서 풀어보려고 했던 걸 조르바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다. 내가 책 속에서 얻고자 했던 지혜를, 내 아내는 창 밖의 꽃을 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타인과 담소화락에 부대끼며 깨닫는다.

 

 

 

 

 

 

13.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는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 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p.420)

 

 

진정 오늘만 사는 남자 조르바. 그리고 지금을 사는 나의 아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소중하고, 나의 주인은 나이며, 아침마다 새로운 기적을 만나고, 온 몸으로 부딪히며 세상을 사는 사람.

 

 

그들처럼 어깨에 들러붙어 있는 짐은 내려 놓고 현재에 집중하며 집중하고 순간을 살아가자.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면 그게 곧 행복이다. 오, 일기일회一期一會, 오,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