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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왜 나는 너를 미워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by Keaton Kim 2020. 4. 8.

 

 

 

왜 나는 너를 미워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책장 한 구석에 있는 이 책을 일부러 찾은 건 순전히 박웅현 때문이다. <책은 도끼다>에서 언급한 이 책의 몇 구절들이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그렇게 매력적인 책이었어? 내 기억엔 좀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랑 이야기였었는데..... 그리하여 박웅현의 독법처럼 문장 하나하나를 씹어가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주인공인 '나'가 클로이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약간의 권태기를 거쳐 이별하는 이야기다. 문장을 꼭꼭 눌러가며 이 진부하고도 독창적인 연애 소설을 읽었지만, 역시 재미는 별로 없다. '나' 라는 녀석이 너무 분석적이고 철학적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를 꼬셔서 (실은 클로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라면 먹고 갈래요?" 라며 대시했다)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몇 페이지에 걸쳐 묘사되지만, 내가 그토록 바라는 그 야설 속의 그 묘사는 거의 없고, 절정의 순간에도 관념이니 욕망이니 정신이니 하는 단어로 페이지를 채운다. 사랑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해한다. 이런, 썩을! "보통씨, 정말 보통이 아니군요!" 

 

 

 

 

 

 

남녀가 만나 설레이는 감정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언제나 솔깃하다. 비행기 창틀을 배경을로 한 그녀의 얼굴이 매력적이다. 아, 이 여자는 나의 운명이다. 남자는 그 여자가 비행기에서 자기 옆자리에 앉을 확률을 계산한다. 어마무시한 숫자가 나왔다. 거봐! 이건 우연이 아니라니까. 한마디로 신의 계시지. 우린 운명적으로 만났어. 당신은 나의 이상이야.

 

 

 

남자는 "너를 사랑해. 그러니 너와 키스하고 싶고 같이 자고 싶어"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곧 튀어나오지만 실제로 옮기진 못한다. 섣불리 말했다간 퇴짜를 맞기 싶상이고, 그러면 쪽도 팔리고 관계가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암호로 말한다. 빙빙 돌려서. 하지만 여자는 안다. 신사인척 하는 남자를 결정적으로 유혹한 것은 여자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역시 사랑이 깨지고 헤어지는 부분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부분은 언제나 흥미롭지만 관심은 덜하다. 나랑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무슨..... 그렇담 사랑이 깨지고 헤어지는 건 나랑 직접 관련이 있다는 말이냐? 아, 슬프지만 내 관심은 그쪽이다) 내 친구 윌이랑 여친이랑 둘이서 술을 마시고 여친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친은 친구 집에서 잤다고 한다. 조올라 의심스럽다. 하지만 모른척 한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의심이 싹트고 신뢰를 잃어간다. 남자는 평소처럼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 하지만 여자는 "하지 마. 싫다고!"를 외친다. 남자는 뭔가 잘못 되어가는 관계를 바로 잡으려 대화를 시도하고 여러 노력을 하지만 "가만 좀 놔둬. 씨발." 이라는 성의없는 대답만 돌아온다. 딱 요 지점이 지금 나의 상황이다. 아. 쓰벌.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가동되던 대화의 매력과 유혹은 사라져버리고 이제 대화는 짜증만 일으킬 뿐이다. 연인이 다정하게 행동해도 아이러니가 담긴 행동이 되어버린다. 사랑을 소생시키려다가 오히려 질식시키고 마는 행동이다. (p.221)

 

 

 

구스타프 크림트 <The Kiss, 1907~1908>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미술관

사진 출처 : 다음 백과

 

 

 

대화로는 관계의 회복이 무리라는 걸 깨달은 남자의 다음 행동은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화를 내거나 삐치거나. 내가 자주 하는 행동. 하지만 이건 관계 회복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 오히려 상대를 더 멀어지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내가 해보니 정말 그렇다).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 물론 효과는 전혀 없다. 과거의 그 사랑스런 시절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삐치는 일의 밑바닥에는 그 즉시 이야기를 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질 수 있는 잘못이 놓여 있다. 그러나 상처를 받은 쪽에서는 그 일을 나중을 위해서, 좀 더 고통스럽게 폭발시키기 위해서 쌓아둔다. 문제가 생긴 즉시 이야기했다면 풀렸을 일에 무게가 쌓이게 된다.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화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너그러운 일이다. 그렇게 하면 상대는 죄책감을 키울 필요도 없고, 전투를 중단해달라고 삐친 사람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클로이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p.226)

 

 

 

결국 여자가 '나'의 친구와 바람이 났다는 걸 고백하면서 둘은 헤어진다. 고통 속에서 지내던 남자는 자살을 생각한다. 이 부분이 재미있다. 자살을 하는 이유는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주고, 나의 죽음에 상대가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근데 내가 죽으면 상대가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상대를 보며 기뻐할 수 없다는 거다. 오호라. 보통씨. 천재아냐?

 

 

 

처음 사랑에 빠질 땐 그렇게 매혹적으로 보였던 여자가 헤어지고 나니 달라 보인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는 원래 이기적이었고, 인정머리도 없으며, 배려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피곤할 땐 짜증부터 냈고,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인간이었다.' 라고 재해석한다. 실제로도 그랬을 수 있고.

 

 

 

애인과의 이별에 남자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처는 다시 아물고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결말로 소설을 끝이 난다. 근데, 좀 허무하다. 내가 바란 건 사랑이 식고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할 때, 이렇고 저렇고 하는 구체적인 노력으로 둘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거였다. 보통씨는 이를 바로잡을 방법은 거의 없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가? 예전의 그 사랑하던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건가? 그렇다면 좀 절망적인데.....

 

 

 

프란체스코 하예즈 <The Kiss, 1859>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사진 출처 : 다음 백과

 

  

 

왜 우리는 서로 미워하는가.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는데. 딱히 꼬집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랑했을 땐 그 사람의 장점이 이젠 더 이상 장점이 아니다. 똑부러지는 성격은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에 여유가 있는 건 우유부단함으로 바뀌었다. 서로 말하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여러 감정들이 눌리고 눌려서 이제는 더 이상 감당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제라도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내가 화를 내거나 삐치거나 하는 행동의 목적은 무엇인가? 상대가 불행해지고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을 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전이 그 애틋하고 재미나고 사랑하는 관계로 돌아가는 게 내가 원하는 거다. 그렇다면 이런 나의 행동은 전혀 효과적이지 못하다. 서로 더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다 싫다. 날 내버려둬, 제발!" 이라고 외치는 상대에게 그걸 해결하려고 하는 대화나 행동은 보통씨의 말처럼 이제 소용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하나? 이 상황에서 관계를 바로잡고 이전의 그 사랑하던 사이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자, 먼저 상대가 원하는 걸 들어주자. 상대의 행동에 일절의 간섭도 없이 내버려둔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안되니 이 행동을 아주 친절하게 하자. 애정의 눈으로 지켜보는 거다. 조용히 내조하며.

 

 

 

그리고 상대의 행동에 관심을 갖는다. 상대가 나에게 원하는 바가 뭔지 정확하게 파악한다. 말은 안해도 암호로 표현하는 것들을 제대로 알아내서 그렇게 하자. 시키기 전에 먼저. 상대가 하자는 거에 토를 달지  않고 전적으로 하기, 절대 화를 내거나 삐치지 않는다. 이렇게 나의 욕구를 드러내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상대를 존중하고 먼저 행동하고 도와준다. 나의 변화된 모습에 상대가 돌아올 때까지. 기한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른다. 인내심이 관건이다. 내가 먼저 지쳐서 포기하면 안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책 속의 '나 (실제로는 보통씨)'보다 훨씬 나은 결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