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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

도끼까지는 무리더라도 호미는 되어야..... : 박웅현 <책은 도끼다>

by Keaton Kim 2020. 3. 31.

 

 

 

도끼까지는 무리더라도 호미는 되어야..... : 박웅현 <책은 도끼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습니다. 거대한 서사에 압도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박웅현의 이 책 <책은 도끼다>가 떠올랐습니다. 책꽂이 한 켠에 있던 책을 빼들고 <안나 카레니나> 편을 읽었습니다. 인물의 성격에 대해 제대로 규정했고 문장의 디테일을 챙기는 힘도 대단했습니다. 읽을 땐 미처 생각치 못했던 점을 짚어주었고, 그래서 <안나 카레니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그 부분만 읽고 책을 내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차근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으면서 책을 접는 부분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아니, 박웅현 이 냥반, 고수도 보통 고수가 아니잖아, 예전엔 이 책 뭘 읽은 거지? 하며 책의 뒷편을 보았습니다. 2011년에 초판이고 이 책은 2012년에 나왔네요. 흠, 오래 되었네요. 이 책의 구절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요ㅎㅎㅎ.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산수유에 대해 쓴 글을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잠깐 옮겨보겠습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저는 김훈의 이런 글을 몇 개 읽은 다음에야 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책이나 그림, 음악 등의 인문적인 요소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촉수를 만들어줍니다. 김훈을 읽기 전에는 산 세월이 훨씬 긴데 산수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산수유가 하나하나 보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빛깔 자체가 흐릿한 산수유는 그냥 지나치면 모르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정말 빛이 그림자 속에 모여 들끊는 것 같아요. 책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이렇게 생길 듯 말 듯 하면서 느닷없이 없어져버린다는 겁니다. 이 다음 구절은 정말 아름다워서 줄 친 데 위에 또 줄을 쳐놨는데,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이 구절을 읽고 어떻게 산수유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책을 왜 읽느냐, 읽고 나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인생이 풍요로워집니다. 그전에는 산수유를 보고도 뭐 저렇게 특징 없는 꽃이 다 있어 했는데 이제는 나무가 꾸는 아련한 꿈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p.75)

 

 

 

박웅현의 이 글을 읽으면서 저도 산수유를 상상하면서 읽었습니다. 아주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김훈의 글을 읽기 전에는 산수유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의 글로 인해 촉수가 생겨 아주 잘 보인다는 그의 설명입니다. 예전에 유홍준 교수의 책이 그랬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폐사지의 돌덩이와 벌판에 서 있는 탑이 쨘~~ 하고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더랬죠. 분명 여태 봐 온 절이고 탑이었는데 유교수의 책을 읽고 가면 뭔가 달라보이는 거죠. 

 

 

 

저자는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의 글을 읽고 나니 정말 그렇습니다. 꽃을 보고 바람을 느끼는 촉수가 생겨납니다.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뜨리는 촉수 말입니다. 조르바는 아침에 일어나서 보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엄청난 촉수를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촉수가 없으니 책을 읽고 만들어야 합니다. 촉수가 많으면 삶도 풍요로워지겠지요.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고은 <순간의 꽃>

 

 

목적을 향해서 뭔가를 할 때는 다른 것은 안 보여요. 어딘가 가기 위해 노를 저을 때는 그것만 하는데 노를 놓쳤어요. 할 게 없죠. 그러면 넓은 물이 보여요. 삶이 똑같아요. 비슷한 이야기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등산할 때 잘 생각해봅시다. 목표점을 향해 올라갈 때는 꽃을 못 봅니다. 올라가는 데에만 신경을 쓰니까요. 하지만 내려올 때는 꽃을 보는 여유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짧은 글에 담겨 있습니다. (p.148)

 

 

 

참 맞는 말입니다. 요즘 제가 직장에도 안나가고 집에서 놀고 있으니 예전 일 할 때는 미처 보지 못한 걸 많이 보고 있습니다. 올라갈 때 못 본 꽃도 보고요, 근데 올라갈 때 못 본 똥도 보입니다ㅋ. 아름다운 것만 보이면 좋으련만 드러운 것까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참, 어떤 건 오히려 안 보고 살 때가 나았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집에서 노니 이것저것 다 보여서.... 그 참....ㅋㅋ

 

 

 

어느 단체에서 강의를 의뢰하면서 강의 제목을 말해달라고 하길래, '개처럼 살자'라고 보내줬습니다. '개는 밥 먹을 때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잘 때 내일의 꼬리치기를 걱정하지 않는다.'가 제목에 대한 설명이었어요. 개야말로 지금 순간을 살고 있고, 개처럼 살면 현재를 온전히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p.191)

 

 

 

선사 조주가 "차 한잔 들게"라고 한 말에는 아무런 신비나, 형이상학이나, 배면에 숨긴 함축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액면 그대로입니다. 우리 모두 차를 끓이고, 따르고, 마십시다. 그게 '있어야 할' 전부입니다. - 한형조 <붓다의 치명적 농담>

 

 

그냥 현재에 집중해서 살아라, 카르페 디엠. 도가 어디 있는지 생각하지 말고 차를 마실 때 차를 마시면 되는 거다. 네가 하는 일을 제대로 하면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p.343)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걱정이나 불평은 집어치우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기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하면 된다.' 입니다. 창 밖에 피어 있는 꽃들의 향연을 즐기고, 봄 내음이 가득한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아이들과 함께 팔굽혀 펴기, 턱걸이를 하고, 아내와 함께 장을 보고 맛나는 걸 해서 함께 웃으며 먹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쓰면서 살면 된다고 읽었습니다. 

 

 

 

 

 

 

 

저자는 책을 읽는 방법이 조금은 특이합니다. 광고를 만드는 분이라 물론 책을 많이 읽겠지만, 그렇게 많은 수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깊게 읽는다네요.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습니다. 좋은 부분, 감동 받은 부분을 따로 떼서 별도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이 다 그의 독법에서 나왔습니다. 박웅현이 소개하는 책은 대부분읽었지만 그의 눈높이를 따라가다 보니 문장 하나하나가 다 새로웠습니다. 예전에 읽은 책들이 다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기 시작했고, <자전거 여행>은 이 책과 함께 읽었습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도 책꽂이에서 찾아 두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룬 몇 권의 책은 다시 읽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읽은 느낌과 저자의 느낌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남의 서평을 읽으면 내가 미처 생각치 못한 부분을 깨우쳐 줍니다. 책을 읽은 후의 또다른 재미입니다. 저자는 자신에게 '울림'을 준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게 이 강의의 목표라고 했는데 완전 '성공'입니다ㅎㅎ.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카프카가 <변신>에서 했다는 저 말을 처음 접한 것도 이 책이었습니다. 저자에겐 책이 도끼였습니다. 얼어붙은 감성을 깨뜨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 말이죠.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쩌렁쩌렁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에이 설마? 했지만 이 책에 나온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도 들었습니다. 내 안의 뭔가가 깨지는 소리를요.

 

 

 

박웅현의 이 강의는 읽는 게 즐겁습니다. 나의 촉수를 건드립니다. 특히나 이 분처럼 세심하고 재미나게 쓴 글은 나의 촉수를 자라나게도 합니다.

 

 

 

그러다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똑같은 <안나 카레니나>가 박웅현에게는 도끼가 되는데 왜 나에게는 호미 정도도 되지 못할까? 어디에서 차이가 날까? 저자가 말하는 깊이 있는 독서도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의 상상력도 한 요소가 될 겁니다. 책을 읽으면서 연상하고 생각하는 능력 말이죠. 개인의 경험에서 오는 배움의 차이도 있을 수 있구요, 그리고 감수성 자체에도 차이가 있을 겁니다. 너무 얼어 있으면 도끼가 아니라 오함마로도 깨기 힘들테니까요.

 

 

 

책을 읽는 이유, 내 안의 숨은 감수성을 깨워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박웅현 아저씨의 말입니다. 광고쟁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웬만한 인문학자보다 사유의 깊이는 더하네요. 존경합니다. 그럼 나는? 뭐, 거창하게 도끼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호미 정도만 되어도 만족할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