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돈만 벌러 오지 않았다 삶이 아닌 건 살지 않겠다 : 서한영교 <두 번째 페미니스트>
어? 들이야. 이 책 그거 아이가?
맞아여.
어디서 났노?
안군이 줬어요. (안군은 들이 국어샘이다.)
읽어봤나?
네.
어떻대?
기억이 잘 안나요.
너거 학교 선배라 안했나?
맞아요. 2긴가?
학교에 강의하러 왔대메.
네.
어떻대?
기억이 잘 안난다구요!
아이가 다니는 간디학교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되었다. 분명 학생들 중 누군가가 이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자기 학교 선배가 쓴 책인데 아주 재미있다고. 그 뒤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딸아이의 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궁금해서 들이와 대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 실패다. 페미니스트 라는 주제로 딸과 대화를 나눌 절호의 찬스였는데.....
밴드 활동을 하던 열여덟 살의 어느 날, 부산의 한 호프집에서 어떤 여인을 만난다. 블레이즈 머리에 얼굴에 피어싱이 가득했고, 서울 사투리를 쓰며 말보로 레드를 피우는, 여태 만나본 여인들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다. 둘은 가끔 만나 이야기하는 관계가 된다. 유학을 가기 전, 책에서 미.인.으로 표현한 그 여자를 마지막으로 만나지만, 여자는 이미 앞이 거의 안보이는 상태.
남자는 여자의 곁에 머무르기로 결심한다. "같이 아프자."며 둘은 연인이 되고, 망설일 것 없이 동거를 시작한다. 보일러가 되지 않는 세 평짜리 단칸방에서 그들은 오래 보듬었고, 미인은 그에게 곱슬머리가 예쁘다고 했다. 중학생 이후로 내내 저주스러웠던 곱슬머리가 탐스럽게 변하는 장면이다. 부모님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지구에 돈만 벌러 오지 않았다.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겠다.
시를 살아내겠다. (p.293)
눈이 멀어가는 아내의 손발이 되고, 갓난 아이를 품에서 키운다. 남편, 아빠, 주부의 역할을 하며 밥벌이로 글을 쓴다. 책에 나온 그의 생활이다. 힘들고 불행할 것 같다고? 전혀 그렇지 않다. 참 씩씩하고 꿋꿋하다. 지구에 돈만 벌러 오지 않았고 삶이 아닌 건 살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공언한다. 거기다가 시를 살아내겠다니. 근데 그렇게 살고 있다. 이 친구 보통이 아니다. 한번 보고 싶다. 들이야, 강의할 때 아빠도 좀 불러주지.
사진 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712060601396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 애인과 나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100일 동안 애인은 수유와 산후조리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그밖의 모든 일은 내가 맡는 것으로. 지난 100일 동안 황홀함과 당혹함 사이를 오갔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홀했고, 달래지지 않는 아가의 울음과 어설픈 살림살이 앞에 자꾸 지쳐가는 나를 보며 당혹스러웠다. 황홀함과 당혹함 사이를 오가며 100일을 건너왔다. 황홀함과 당혹함을 오가는 동안 아가가 백일을 맞았다. 쑥쑥 큰다. 그럴 줄 알았다. 건강한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양파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p.123)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돈 벌러 갔다. 육아는 당연히 아내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세째가 태어나고는 보름만에 한번씩 집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열심히 일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돈을 벌었다. 아이가 생기면 '아, 육아를 열심히 해야지'가 아니라 '열심히 돈을 벌어야지' 라고 다짐했다. 육아는 여자의 몫, 밥벌이는 남자의 몫이었다. 당연한 거 아냐?
그게 당연하지가 않다. 당연하기 않다는 걸 안다. 밖에서 열심히 일하다 집에 왔으니 쉬는게 당연하지 않다. 내가 일할 동안 아내는 그만큼 치열하게 육아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왔을 땐 적어도 절반 이상의 육아를 해야 당연한 거다. 아이가 태어나고 100일간은 수유와 산후조리외 모든 일을 자신이 한다는 구절은 남자인 내가 봐도 폼난다. 딸이 저런 남자와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들들도 저렇게 하면 참 좋겠다.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그보단 한 소년의 성장기다. 철없던 소년이 방황을 하고, 여자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는 이야기다. 한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이고, 아이를 사랑하는 씩씩한 아빠의 이야기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가장의 이야기이며 서로 아끼고 돌보며 반짝이는 삶을 사는 가족의 이야기다. 작가가 꽤나 멋지다. 시인이라 하더만 글도 매력적이다. 담에 강연하러 간디학교에 오면 꼭가야지. 만나서 악수라도 한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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