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영화보다 재미있는 책 :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숨을 쉴 수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날 죽이지 마세요.
흑인 청년이 수갑을 찬 채 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백인 경찰은 그 위에서 청년의 목을 무릎으로 누릅니다. 깔린 청년은 살려달라고 겨우 말하고 있으나 경찰은 요지부동입니다. 청년은 의식을 점점 잃어갑니다. 옆에 다른 경찰이 있었으나 보고만 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기도 하며 경찰을 향해 그러지 말라고 죽어간다고 외쳤으나 경찰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이내 코에서 피를 흘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고 현장에서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습니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에폴리스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난리가 났습니다. 체포 당시 촬영된 영상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는 시위에서 인종 차별에 대한 항의 시위로 확산되었습니다. 경찰은 그 시위를 더욱 강한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고(경찰차가 시위대에 무작정 돌진하는 영상도 있었다. 식겁했다.) 항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으며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지난 5월 25일 경찰관의 무릎에 목을 눌린 조지 플로이드. '숨을 쉴 수 없어요(I can't breathe)'는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사진 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23788608
천조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참 친절한 형님이자 세계를 지키는 지구방위군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있는 기회의 나라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제가 어릴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그게 완전히 개구라였다는 걸 눈치챘습니다.
요즘 일련의 사태를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엉망진창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가 걸려도 비싼 의료비 때문에 치료를 받을 수 없고, 경찰이 시내 한복판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사람을 죽여도 말릴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인종, 계급, 남녀, 출신 등 온갖 차별이라는 차별은 무지 심각하며 무엇보다 맘에 안들면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아주 무시무시한 개차반 나라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미국 영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고 있는 여성의 사진. 'I can't Breathe'는 만국 공통어가 되어버렸다.
사진 출처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603018008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라는 부제를 단 김두식 교수의 이 책은 진짜 영화보다 재미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하며 그 속에 담긴 여러 차별들을 예로 듭니다. <똥파리> <연애의 목적> <300> <빌리 엘리어트> 등의 영화에 담긴 속 뜻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는 '하! 이 영화가 이런 내용이었어? 그런 숨이 뜻이 있었고나.' 하며 무릎을 치기도 했습니다. 책에 소개된 안토니아와 바스의 대사(남자 : 남편이 필요치 않나요? 여자 : 어디에 써먹게요?)가 너무 인상적이었고, 가부장주의와 혈연주의에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영화라고 소개해서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는 영화는 직접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딱히 재미는 없었습니다^^.
매년 600명 이상의 청년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교도소에 간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렇게 병역을 거부하는 청년들은 1년 6개월의 형에 처해진다는 군요. 무엇보다 문제는 이 청년들이 모두 범죄자가 된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들에게 민간대체복무를 시켜서 청년들도 살고 나라도 살자고 제안합니다. 이런 아주 슬기로운 방법이 있는데 왜 아직 실현이 안되고 있는지 의아합니다.
.....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애어른들에게 "인생이 걸린 일이니 신중하게 결정라하"고 말합니다. 말이 쉽죠. 하지만 아무 정보도 없이, 수험 준비 말고는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본 경험도 없이, 어떻게 '신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겁니다.
몇년 후면 그 나이가 될 우리 딸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합니다. 결국 자기 인생이니 스스로 결정해야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해주고 싶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10대나 20대 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느라 인생이 몇년 늦어지는 것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닙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딱 그 시기에 모든 인생이 결정난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 착각이 모든 사람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길이 열리지 않을 뿐입니다. (p.41)
고3이 된 아들이 조금 불안해하자 "괜찮아. 대학에 꼭 가지 않아도 돼. 별 거 아니야. 니가 하고 싶은 걸 찾는 게 우선이야." 라고 말해주었지만, 저도 조금은 초조해졌습니다. 그런 저에게 김두식 교수는 저렇게 똑부러지게 말해주었습니다. 청소년 인권 파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성소수자, 여성과 폭력, 장애인, 노동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 인종 차별, 표현의 자유, 그리고 제노사이드까지 여러 주제의 인권에 대해 아주 알기 쉽고 재미나게 풀어서 이야기합니다. 인권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그렇지 그냥 사람이 사는 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종 차별에 대한 시위로 글을 시작했는데요, 우리나라도 인종차별이 아주 심한 나라라고 합니다. 백인과 그 외의 외국인(동남아,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등)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외의 외국인'에 대한 우월감이나 편견, 경멸 등의 감정은 이미 위험수위에 도달했다고 단언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도 외국인(근로자)이 아주 많습니다. 외국 체험을 하려면 시내의 시장에 가면 될 정도입니다. 저는 그들을 많이 배려합니다만, 그것조차도 나쁜 발상이라고 합니다. 외국인은 배려나 편견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거죠. 읽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책 속에 김두식 교수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중산층의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자라 교수가 되었으며 그렇기에 노동자의 입장에 진정으로 서 본 적도, 사회운동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자란 배경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에 노력은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너무 솔직한 거 아녀요? 교수님. 이렇게 자신을 고백할 정도니 믿음이 팍팍 갔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쉽고 재미나게, 그렇지만 결코 얕지 않게 사람이 사는 도리에 대해 차근히 말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리고 다 큰 어른들도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입니다.
감히 말하지만, 인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입니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만큼 배가 넉넉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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