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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야기

오 나의 몸이여, 내가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 염운옥 <낙인찍힌 몸>

by Keaton Kim 2021. 6. 24.

 

차별금지법이 다시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차별금지법을 만들자는 국민청원이 10만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국민청원도 바로 올라와서 10만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취임한 젊은 여당 대표가 "입법 단계에 이르기에는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며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혀 더 논란이 되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말 그대로 차별하지 말자는 법입니다. 그럼 무엇에 대한 차별일까요? 성별, 장애, 병력(病歷),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ㆍ유전정보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사회적신분 등입니다.

 

이게 당연한게 아닌가요? 당연히 차별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아직도 사회 전반에서 이에 대한 차별이 많이 일어나니 법으로 그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겁니다. 사회가 훨씬 공정해지겠지요. 근데 이 법은 2008년에 노회찬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최초로 발의했고, 그 후로도 몇 차례에 걸쳐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여태 안되고 있습니다. 국제인권기구에서도 울나라에게 수차례 권고했습니다. 안되는 이유는 역시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기 때문입니다.

 

반대하는 가장 큰 세력 중의 하나는 기독교인데요, 차별금지법이 제정이 되면, 그 법에 반대하는 자신들이 법에 의해 처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역차별이라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동성 가족이 늘어나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어 사회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는 말이가 빵구가 주장도 함께 펴고 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2007년부터 여러 차례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2019년 현재까지도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법은 최대치를 해주지 않지만 인종, 민족, 계급, 성, 성적지향, 장애유무 등을 기준으로 인간을 구분하고 값을 매기는 모든 차별에 대항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해줄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지만 인권의식을 벼리는 계기를 만들어줄 것이다. (p.381)

 

이 책에서 저자는 울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종주의(특히나 이주노동자의 문제)에 맞서기 위해 차별금지법이 꼭 필요하다며 이 법의 의미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참 지당한 말입니다. 저는 이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배우지 못해서 그 참뜻을 깨우치는 눈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언론이나 타인들이 하는 말에 자신의 판단을 맡겨서 그렇습니다.

 

 

인종은 셋으로도 넷으로도 다섯으로도 아니 무한대로도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종이란 없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다양한 인간의 몸을 인종이라는 틀에 억지로 구겨 넣었던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황인, 흑인, 백인'이다. 그러니 베네통의 또 다른 광고인, 벌거벗은 모델 아홉 명이 옆으로 서서 서로의 몸에 손을 얹고 있는 광고 역시 백인, 흑인, 황인의 몸에 대한 단순한 스테레오타입의 반복일 뿐이다. 백인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 황인은 찢어진 눈에 도드라진 광대뼈, 흑인은 칠흑 같이 새까만 피부,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그 이미지 말이다. (p.22)

 

저자는 이 책에서 인종에 대한 역사에서 부터 흑인, 흑인 여성, 유대인, 무슬림의 차별,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인종주의가 울나라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차별에 반대했던 흑인 여성들(구체적으로 사르키 바트만, 메리 프린스, 서저너 트루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꽤나 흥미로웠고 슬펐습니다. 책 모임을 함께 하는 한 분은 "바트만의 그 사진이 책에 실리지 않아서 더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200년 전의 바트만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 아주 예뻐서 참 좋았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일어난 브레이비크 테러 사건도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특정인에 대한 혐오가 낳은 비극입니다. 본 시리즈를 만든 감독이 이 사건을 영화로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책 말미에 언급한 네팔 사람 미누도 첨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를 주인공을 한 <안녕, 미누>라는 영화도 있다고 합니다. 두 영화 다 꼭 보려고 합니다.

 

바이런 킴, <제유법> 한국계 미국 미술가 바이런 킴의 작품이다. 커다란 직사각형 화면은 가로 25cm, 세로 20cm의 작은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직사각형은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지인들의 피부색을 보고 칠한 것이라고 한다. 진갈색, 베이지색, 연분홍색, 커피색, 살구색, 회백색, 흑갈색..... 어느 색 하나 같지 않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제유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피부색이란 한낱 피부 한꺼풀의 색일 뿐인데 인종주의는 패부색이라는 한 부분을 인격 전체로 확대해 있지도 않은 의미를 부여한다. 나와 너를 구분 짓고, 낙인 찍힌 사람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며, 권리를 박탈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없다는 것을.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존재할 뿐 (p.376)

 

아부다비에서 일할 때 참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발주처 사람들은 여기 토박이 친구들이고, 업체들은 이집트, UAE, 사우디, 중국 친구들이었고, 우리 현장 스탭들은 인도, 필리핀, 스리랑카, 가나에서 온 친구들이었으며, 가장 말단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서 왔더랬습니다. 서로 다른 생김새, 종교, 문화를 가졌지만 함께 어울려서 잘 지냈습니다.

 

저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일을 잘 못합니다. 함께 일하면 많이 답답합니다. 근데 그게 우리의 눈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우리를 보면, 이건 일만 하는 아주 미친놈들입니다. 새벽 같이 출근해서 밤 늦게까지, 일 밖에 모르는 놈들입니다. 맞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비정상이라는 걸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걸 인정하면서 일하기가 좀 더 쉬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순수합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약아빠진 녀석들이 가끔 있긴 하지만 그건 일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은 것에 고마워하고, 예의 바르며, 심성이 착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좋아합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외국인이 참 많습니다. 김해 원도심 시내에 나가면 이건 아얘 외국입니다. 외국을 가려면 동상동에 가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생겼습니다. 저는 그들을 볼 때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외국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그들에게 잘 해주고 싶고,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싶습니다. 공방이 있는 동네에도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공방 앞 길을 매일 아내와 아이와 함께 산책하는 외국인이 있습니다. 그와 마주치면 나는 눈인사를 나눕니다. 이젠 제법 고개도 숙이며 서로 손짓도 합니다. 기회를 봐서 공방에서 대접하려고 합니다.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PS. 그리고.....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네, 이 영화를 봤습니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정부 청사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8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쳤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오슬로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우튀위아 섬에서 총기 테러로 학생 69명이 죽었습니다. 범인은 브레이비크라는 극우주의자였습니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브레이비크가 정부 청사를 테러하고 섬에서 학생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아주 실감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잡힙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엉? 벌써 범인이 잡혀? 이 영화 두 시간 반 짜린데..... 범인이 잡히고 영화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범인의 재판 과정을 더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범인이 사람을 죽일 때보다 더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변호사를 지명하고 또 변호사는 최선을 다해 변호합니다. 어린 학생을 사냥하듯 죽인 범인을 말이죠. 범인은 심지어 구치소에서 피자을 먹으며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는데 노르웨이는 침착합니다.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합니다. 서로 최선을 다해 배려합니다.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총리에게, 피해자들은 잘못한 건 테러범이니 앞으로 국정을 더 잘 이끌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노르웨이에서 극우주의자에 의해 저런 테러가 일어났다는 자체가 충격이었고, 그에 대처하는 노르웨이 사회와 시민들의 모습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을 겁니다. 저 정도의 사회, 그 정도의 시민 의식을 가지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세월호'가 연상되었습니다. 최악의 사태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 떠올랐습니다. 어른들은 책임을 전가하고, 편을 가르고, 아픔을 위로하는 대신 서로의 생채기를 때렸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잘 살게 되었지만 아직 정신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언젠가 세월호를 주제로 한 영화도 나오겠지요. 그 영화를 볼 때 쯤 우리들의 모습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좀 성숙해져 있을까요? 부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