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셰릴처럼 내 안의 비밀을 찾을 수 있을까? : 셰릴 스트레이드 <와일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p.549)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으로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낸 여인이 있습니다. 1968년 생인 그는 작가를 꿈꾸기도 하지만 폴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열아홉살에 결혼을 합니다. 행복한 시절을 잠시 보내기도 하지만, 자신의 희망이자 전부였던 엄마가 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급속하게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일상은 망가지고,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급기야 마약에도 손을 대며 남편과 이혼하게 됩니다. 시궁창 같은 인생의 절정기에 우연히 PCT(Pacific Crest Trail) 여행 안내서를 보게 됩니다.
단 한장의 책 표지 사진에 이끌려 '몬스터'라 불리는 자기만한 배낭을 매고 4285Km의 미국 서부를 도보로 종단하는 여행을 떠납니다.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말이지요. 고행과 같은 도보 여행의 목적은 "강한 의지와 책임감,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르지 않은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PCT를 종주하겠다고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아무런 준비없이 떠난 이 지옥과 같은 걷기에 날마다 좌절하게 됩니다. 불을 피우지 못해 식어빠진 죽만 계속 먹었으며, 물을 보충하지 못해 탈진하기도 하고, 방울뱀과 여우 곰 같은 온갖 야생 짐승과 만나기도 하고, 무거운 배낭으로 어깨와 등이 짓무르고 발톱이 6개나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 정신적 육체적 고통속에서도 걷기를 포기하지 않고 결국 자신이 정한 최종 목적지인 '신들의 다리'까지 완주합니다.
PCT (Pacific Crest Trail)
미국 3대 트레일 중 하나로, 맨 아래 멕시코 국경에서 출발하여 캘리포니아주와 오리건, 워싱턴주를 거쳐 캐나다에 이르는 미국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4285Km의 도보길이다. 완주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고,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숙영 장비 및 취사도구를 짊어지고 걸어야 하는 도보 여행이다. 사막, 화산, 산맥, 원시림, 고산지대 등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극한의 자연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악마의 순례길이다. 지도의 굵은 선이 저자가 걸었던 루트다.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eojh1&logNo=221074586050
사실, 이건 그냥 걷는 것과는 그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지옥을 걷는 일보다는 조금 덜한, 뭐 그 정도 수준이랄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땀을 비 오듯 쏟기 시작했다. 길이 북쪽으로 향하자 등산화와 종아리에 먼지가 쌓여갔고 이제는 그저 험난한 지형이 아니라 등산하는 산에 가까와졌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투쟁이었다. 두 다리 위에 올려놓은 몸뚱이가 무너져 내리면서 적막한 황무지 속으로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p. 88)
4일째 되는 날 아침, 물탱크를 떠나며 12리터 가량의 물을 다시 가득 채웠다. 나는 내가 기이하고 추상적이며 과거를 떠올리는 듯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품은 여러가지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놀라운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말이다. 길가에 피어난 사막을 꽃 한 송이가 나를 간질이는가 하면, 저 산들 너머로는 희미해지는 태양과 함께 장대한 하늘이 펴쳐저 있었다. (p.118)
나는 한 손에는 숟기락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헤드램프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여행을 시작한 후 첫 일주일은 너무 지쳐 겨우 한두 쪽만 읽다가 골아떨어지곤 했다. 그렇지만 점점 걷는 일이 익숙해지면서 더 많은 쪽들을 읽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지루함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지난밤 내가 읽은 부분을 불태웠다. (p.189)
PCT에서 맛보는 근원적인 고독은 내 안에서 다른 감정으로 변해갔다. 이제는 더 이상 그저 작은 공간에서의 고독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되었다. 나는 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걸으며 온 세상에서 혼자된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머리 하나 둘 곳 없는 이런 광활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세상은 이전보다 더 크게도, 그리고 더 작게도 느껴졌다. 지금까지 나는 이 세상의 광대함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직접 내 발로 걸어보니 1킬로미터가 얼마나 되는지도 실감할 수 있었다. (p.211)
1995년 PCT를 여행하던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의 모습
이제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긴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이제야 내가 하길 원했던 뭔가를 막 밝혀내는 기분이랄까. 나는 여전히 가슴속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여자였지만 그 구멍은 이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작아지고 있었다. (p.336)
나는 들어왔고 나는 떠났다. 내 뒤로는 캘리포니아가 마치 기다란 비단 장막처럼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멍청한 바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대단한 여전사도 아니었다. 내 안의 나는 이제 강하면서도 겸손하며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다. 나는 그 사슴처럼 이 세상에서 안전했다. (p.415)
이제 내 마음은 온통 여행의 끝에 가 있었다. 케스케이드 록스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리며 흥분도 되었지만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나는 야외에서 생활하며 텐트 안에서 잠을 자고 거의 매일 하루 종일 혼자 숲 속을 걷는 일이 일상생활처럼 다가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이제 그런 생활과 작별할 생각을 하니 그게 오히려 더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p.540)
이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15년이 흘러,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벤치를 다시 찾아 네 명이서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나는 내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라 불리는 먼 길을 혼자 걸어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여행의 의미가 내 안에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내가 항상 찾아 헤매던 나의 비밀이 어떻게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지를. 그렇게 나는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 (p.548)
책은 2012년에 나왔다. 저자가 PCT를 여행한 것이 1995년이니 무려 17년 후에 그 여행이 활자화 된 것이다. 그럼에도 책은 바로 어제 일 같이 생생했다. 그리고 3년 후에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PCT라는 것도 몰랐다. 기억에도 오래 남지 않은 영화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다시 찾아 보았다. 장면 장면이 온 몸을 파고 들었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여행의 풍경이 그대로 다가왔다. 책의 스토리를 모두 담을 수는 없었겠지만 원작에 충실하게, 그리고 좀 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책을 읽고 영화도 꼭 보기를 추천한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55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인 셰릴과 함께 했습니다. 그를 따라 나도 PCT를 걸었습니다. 발톱이 빠질 땐 나도 아팠으며 숲속에서 나쁜 남자를 만났을 땐 조마조마했고, 아름다운 일몰을 그와 함께 보았으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함께 기뻐했습니다.
여행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궁금했습니다. 책의 말미에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 낳고 가족들에게 자기의 여행에 대해서,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들려주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그 경험담이 이렇게 책으로 나와 자신의 꿈까지 이루었으니 참 다행이고 대견합니다. 내가 다 뿌듯합니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그와 같은 여행을 꿈꿉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요. 인생의 전부를 잃었던 저자가 PCT라는 극한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대자연의 고독한 아름다움 속에서 완전히 발가벗은 나와 마주할 때 나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셰릴 스트레이드는 그것을 글자로 표현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지만, 단지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마음 속의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면 안락한 방에서 그의 책을 읽는 것으론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밖으로 나가 온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매일 겪는 일상의 치열함과 지루함과 찌질함에서 내 안의 그 무엇을 찾을 수는 없을까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도 처음에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야외에서의 생활이 일상이 되어, 오히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걱정스러웠다고 하니까요. 저자처럼 완벽한 고통속에서 내 안의 비밀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나의 지루하고도 치열한 일상에서 내 안의 자그마한 그 무언가를 찾아 보렵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염없이 걷는 것이 일상이 되는 경험은 악마의 순례길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셰릴도 했는걸요.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꼬질꼬질 희희락락 그리고 뭉클함 : 박민우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0) | 2017.12.12 |
---|---|
그는 여행이 생활이고 나는 생활이 여행이다 : 유성용 <여행생활자> (0) | 2017.11.27 |
떠난 자 그리고 기록한 자 : 오영욱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0) | 2017.07.22 |
딸, 얼른 짐 싸자!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교토의 역사, 교토의 명소 편> (4) | 2017.07.01 |
언젠간 나도 가보고 말테얏!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0) | 2017.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