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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딸, 얼른 짐 싸자!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교토의 역사, 교토의 명소 편>

by Keaton Kim 2017. 7. 1.

 

 

 

딸, 얼른 짐 싸자!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교토의 역사, 교토의 명소 편> 

 

 

 

1. 광륭사 (廣隆寺, 코우류우지)

 

 

 

 

유홍준 교수가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담은 사진 중 최고의 명작이라 생각하는 오가와 세이요의 흑백사진.

 

사진 출처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8949

 

 

 

나의 교토 답사기가 맨 먼저 찾아갈 곳은 광륭사다. 광륭사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신라에서 보내준 것으로 전하는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너무도 비슷하여 일분미술사에서는 도래 불상의 상징으로, 한국미술사에서는 사실상 삼국시대 불상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 국보 제1호의 영예를 안고 있으니 한국인으로 교토에 간다면 당연히 한 번은 이 불상을 보러 광륭사에 다녀올 만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권 교토의 명소, p.21)

 

 

 

"이성과 미의 이데아를 표현한 고대 그리스의 신상도 로마시대 종교적인 조각도 인간 실존의 저 깊은 곳까지 도달한 절대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미륵반가상에는 그야말로 극도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 지상의 시간과 속박을 넘어서 달관한 인간 실존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날까지 몇십 년간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감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이 불상을 보고 남긴 찬사, 3권 p.28)

 

 

 

2. 동사 (東寺, 도지)

 

 

 

 

동사 오중탑. 교토의 목탑 중 가장 높으며 매번 벼락을 맞아 부서지고 다시 세우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중건 때마다 헤이안 시대의 원형을 잃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여전히 고풍스럽다.

 

사진 출처 : http://m.blog.daum.net/bulhon/118

 

 

 

왜 내가 그런 처연한 느낌을 받았을까? 아마도 1층부터 5층까지 거의 같은 비례로 올라갔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 정림사 오층석탑에서 보이는 유연한 체감률 없이 거의 수직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대지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거기에 놓인 듯한 인상을 준다.

 

지난해(2013년) 12월, 스산스러운 겨울비를 맞으며 홀로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관람객도 스님도 보이지 않고 꽃도 없는 정원 저쪽에서 빗물에 젖고 있는 탑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찾아오는 고독의 감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화려한 외로움 같은 것이었다.

 

아! 어쩌면 이것이 일본인들이 말하는 스산함의 미학, '사비(寂)'의 미학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일본에서만 맛볼 수 있는 미적 향수였다. 그날 나는 겨울비를 맞으며 오랫동안 이 탑 앞에 서 있었다. (3권, p.175~176)

 

 

 

동사에 가면 보물전은 꼭 들러보라고 권한다. 고려시대의 기념비적 유물 '법화경 보탑도'가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 7권의 내용을 글로 써서 7층 보탑도를 이룬 것이다. 고려시대 몽골과의 전쟁이 치열할 때,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간절한 마음이 글자 하나하나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동사가 이 '사경 법화경'을 소장하게 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내에 있었다면 당연히 국보중의 국보로 지정되었을 천하의 명작이다. (3권, p.179)

 

 

 

3. 연력사 (延曆寺, 엔랴쿠지)

 

 

 

 

원인 스님의 당나라 유학 때 큰 도움을 준 장보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세운 비가 연력사 경내에 있다.

 

사진 출처 : http://m.jpnews.kr/7956

연력사에 대한 좋은 글 소개 : https://brunch.co.kr/@gk5000/8

 

 

 

돌계단을 따라 근본중당에 내려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 여기 와보기로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쾌재라도 부르고 싶었다. 내가 이제까지 사진으로 본 건물은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문이었고 근본중당은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건물(연력사 근본중당) 앞에서 이처럼 기죽어본 것은 처음인 듯 싶었다. 경복궁 근정전은 권위가 있으면서도 북악과 인왕이 멀찍이서 받쳐주어 따뜻한 인상을 주고,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은 그 규모가 장대해도 넓은 공간에 떠받쳐 있어 엄정한 분위기는 있어도 위압적이지는 않다. (3권, p.206)

 

 

 

유홍준 선생은 겨울에 혼자 그것도 비가 추륵추륵 내리는 날 굳이 이 히에이산 구석에 있는 연력사를 보러 갔다. 그리고, 물론 와비사비를 제대로 느껴셨겠지만, 다녀와서 아내에게 애꿎은 투정을 이렇게 부린다. 이.해.한.다.

 

"여보, 나 히에이산 연력사에 와서 스님 사리탑 다녀온다고 삼나무 숲을 한 시간 헤매다 왔어.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고, 비는 내리고, 비탈은 가팔라 죽는 줄 알았어." (3권 p.217)

 

 

 

4. 청수사 (淸水寺, 기요미즈테라)

 

 

 

 

봄 도다리, 가을 전어 라고 하는데, 왠지 봄도 가요미즈데라, 가을도 기요미즈데라 일 것 같다. (글 출처 : 아래 사진 출처의 블로그에서 인용)

 

청수사는 본래 절집이 들어앉기에는 부적절한 자리에 있으나 벼랑의 가파름을 역으로 이용해 넓은 무대를 설치함으로써 깊은 산속의 아름다움과 넓게 트인 호쾌한 전망을 모두 갖게 되었다. (3권, p.227)

 

 사진 출처 : http://www.indica.or.kr/xe/?mid=free_gallery&document_srl=4681164&m=1&listStyle=viewer&page=5

 

 

 

교토에 있는 수많은 절 가운데 청수사가 가장 인기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리앉음새, 이른바 로케이션이 탁월한 덕분이다. 그 자리앉음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비견할 만한다.

 

우리의 최순우 선생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라는 수필에서 '무량수전 배츨림기둥에 기대어서서 멀어져가는 산자락을 바라보며 사무치는 마음으로 조상님께 감사드렸다.'는 명구가 우리에게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다가왔듯이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인 오사리기 지로의 <귀향>에서 묘사된 청수사는 일본인들에게 그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늦은 봄에 청수의 무대에서 시가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거짓말같이 보랏빛 아지랑이가 비껴 있고 여기에 석양빛이 비쳐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이 보였다. 눈이 부시는 듯한 아름다움에 마음속으로 놀란 일이 있었다. 그 보랏빛은 순수한 일본식 그림 물감의 빛이었고, 흐릿하게 뭉개놓은 듯 차분히 부드러운 가락이, 그가 돌아다닌 외국의 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것 이었다.

 

이보다도 채색이 풍부하고 변화가 있는 하늘이나 구름은 대기가 건조한 지중해 해안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선명하게 짙고 부드러운 빛의 아지랑이가 지상의 절들의 큰 지붕이며 새 빌딩의 그림자 덩어리처럼 보여, 하늘에 가로 비껴 있는 우아한 풍경은 확실히 일본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다. (3권, p.228)

 

 

 

5. 평등원 (平等院, 뵤도인)

 

 

 

 

평등원 봉황당 건물의 하이라이트는 중당의 속지붕 가운데를 살짝 들어올려 격자문의 창으로 개방하고, 그 안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상이 밖으로 은은하게 드러나는 모습니다. (3권, p245). 이 건물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권 교토의 역사 책 표지에도 등장한다.

 

사진 출처 : https://matcha-jp.com/ko/749

 

 

 

평등원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권력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1053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우지의 별장을 사찰로 개조하면서 극락세계를 구현한 아미타당을 짓고 아미타여래상을 봉안한 곳이다.

 

평등원은 처음부터 극락세계를 이 땅에 구현한다는 엄청난 구상으로 기획되어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모두가 당대의 명작으로 이름 높았다. 평등원이 지어지고 얼마 안 된 12세기 일본에는 이런 동요가 나왔다고 한다.

 

극락이 의심스러우면 우지의 어당을 찾아가보라

극락이 어떤 곳인가 궁금하다면 우지의 어당을 찾아가보라

 

 

 

나는 민주나 평등의 개념이 없었던 1천년 전에 어떻게 평등원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신기했었다. 그러나 평등원 주지 가미이 몬쇼 스님이 쓴 <평등원 이야기>를 보니, 1563년 평등원의 초대 주지스님이 지은 이름이라면서 그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의내릴 수 있다고 했다.

 

"평등이란 서로 다른 개성이 함께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것이 평등입니다." (3권, p.296)

 

 

 

 

 

 

6. 지은원(知恩院 치온인)

 

 

 

 

지은원 안에서 바라본 삼문.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삼문을 만들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니토쿠릉仁德陵이나 동대사東大寺의 대불처럼 웅대하고 대담한 세계를 개척하는 창조력도 있다고 안도 다다오는 말했다.  

 

사진 출처 : http://ehddu.tistory.com/130

 

 

 

지은원 삼문을 처음 본 답사객들은 한결같이 "우와 크다!" "무슨 절집 대문이 저렇게 크지?" "우리나라엔 저렇게 큰 대문이 없지" 하며 그 스케일에 감탄한다. 교토에는 이런 거대한 삼문이 여럿 남아 있다. 교토의 3대 삼문이라고 하여 지은원, 남선사, 인화사의 삼문을 꼽는다.

 

삼문(三門)은 삼해탈문三解脫門의 준말이다. 해탈에 도달하는 세 가지 법문法門, 즉 일체 만상이 공空이라는 것을 깨닫는 '공 해탈', 모든 존재에 특정한 형상이 없음을 깨닫는 '무상無相 해탈', 세상에 원할 것이 없어지게 되는 '무원無願 해탈'을 이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미를 말하면서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의 미학을 말했지만, 일본은 화려할 때는 더없이 화려하고 또 검소할 때는 더없이 검소한 극단을 보여준다. 나는 이 '극과 극의 공존'이야말로 일본미의 해답을 찾아가는 하나의 '문화적 패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권 교토의 명소 p.24~29)

 

 

 

7. 천룡사 (天龍寺 텐류지)

 

 

 

 

교토 명원의 시작 천룡사의 조원지. 대방장 앞에는 관람객을 위한 긴 의자가 놓여있는데, 한꺼번에 거의 100명이 나란히 앉아 이 조원지의 아름다움을 감상한다고 한다. 그 모습이 더 장관일 것 같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1708h/101

 

 

 

교토의 서북쪽 넓은 정원을 사가嵯峨 또는 사가노嵯峨野라고 부른다. 사가의 명소 천룡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찰로 일본 특별명승 및 사적 제 1호로 지정된 정원이 있는 곳이다. 교토의 대표적 명소로 낙동洛東에 청수사가 있다면 낙서洛西엔 천룡사가 있다. 청수사와 천룡사는 서로 다른 자랑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청수사가 히가시야마에서 내려보는 빼어난 조망이 일품이라면 천룡사는 가쓰라 강변에서 아라시야마를 올려다보는 수려한 풍광이 있다. 청수사 주위가 기요미즈 자카, 차완 자카, 산넨 자카, 니넨 자카 등 언덕길에 있는 오래된 작고 예쁜 상점들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발 디딜 틈이 없다면, 천룡사 주위로는 풍광명미楓光明媚한 도월교渡月橋, 가메야마 공원, 사가노의 죽림이 있어 항시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청수사로 가면 되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천룡사가 제격이다.

 

그 중 천룡사가 청수사보다 크게 내세울 만한 점은 전설적인 고승이자 뛰어난 작정가作庭家였던 몽창 소석(夢窓 疎石, 무소 소세키) 국사가 조성한 조원지(曹源池, 소겐치)라는 정원이 있다는 사실이다. (4권 p.91)

 

 

 

8. 금각사 (金閣寺 킨카쿠지)

 

 

 

 

경호지에 비친 금각. 교토에 와서 이 환상적인 금각사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 교토를 와야 하는 뜻이라고 한다.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pringlll8&logNo=220608764937&parentCategoryNo=&categoryNo=79&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모르긴 몰라도 일본의 수많은 문사들이 이 금각을 예찬하는 명문을 남겼을 것이 분명한데 이방인인 내가 그런 것을 다 알아볼 수는 없고 나도 이 금각의 아름다움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화려하다, 절묘하다, 환상적이다, 황홀하다, 우아하다, 장엄하다, 장중하다, 상큼하다, 어여쁘다, 멋지다...... 내가 아는 미에 관한 형용사를 다 동원해보아도 금각의 아련한 아름다움을 담아내기엔 부족함이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지난 겨울 저녁 나절 인적 드문 금각사에 다시 찾아갔을 때 금각은 흩뿌리는 눈발 속에 여전히 당당한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발 속에서 빛나는 금각은 마치 흰 사라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연상케 했다. 그것은 '시각적 관능미!'였다.

 

그러나 범접하기 힘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시각적 관능미!" (4권 p.151)

 

 

 

500여 년을 잘 버텨온 금각을, 1950년 하야시 쇼켄이란 미친 학승이 불질러 버린다. 1956년 미시마 유키오는 이 방화 사건을 자신의 미학으로 승화하여 소설 <금각사>를 펴낸다. 탐미주의자이자 천재적인 소설가였지만 극우주의자이기도 한 미시미 유키오는 자위대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 자살한다.

 

금각사가 주역인 무로마치 초기는 예술과 문화가 꽃피고 사상과 인문정신이 살아있는 시대였다. 14세기 전반, 무로마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시절은 동아시아 전체가 서로 좋은 영향을 주던 전성기였다. 중국은 명나라 영락제, 조선은 세종대왕 치하였다.  8세기 중엽의 당나라 현종, 통일신라 경덕왕, 발해의 성왕, 나라시대의 쇼무 천황이 함께 누렸던 문예부흥기 이후 600년 만에 찾아온 문화의 융성기였다.

 

또다시 600년이 흘러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이제 다시 동아시아의 3국이 함께 공존하면서 문화의 꽃을 피울 때가 된 것은 아닌가. (4권 p.161~164)

 

 

 

9. 용안사 (龍安寺 료안지)

 

 

 

 

일본미의 상징 용안사의 석정. 일본의 이미지(Image of Japan)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권 교토의 명소 책 표지 그림이 바로 이 석정 사진이다. 비어있음, 변하지 않음, 바라봄, 고요히 마음을 성찰하는 것 같은 선의 의의를 돌과 백사白沙로 표현한 선불교의 상징이자 추상미술이고 설치미술이다. (4권, p.168)

 

사진 출처 : http://martapuig.es/jardin-japones/

 

 

 

일본에는 선의 정원인 석정이라는 뛰어난 관조의 공간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삶의 내용을 다 받아내려는 마당이 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 훌륭한 공간을 갖고 살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는 것은 아닌가.

 

일본 사람들처럼 개념화, 논리화, 형식화해 발전시켜 간다면 '불확정적 비움'의 공간이 이보다 더 잘 구현될 수 없을 것 같다. 용안사 경용지를 지천회유하도록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관조의 공간으로서의 일본의 석정과 삶의 공간으로서의 우리의 마당이었다. (4권, p.196)

 

그렇다. 일본의 정원은 관조의 공간이다.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본디 그렇게 생겨먹었다. 우리의 마당과는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10. 가쓰라 이궁 (桂離宮, 가쓰라 리큐)

 

 

 

 

가쓰라 이궁은 일본 정원의 백미로 꼽힌다. 소설가 시가 나오야가 말하기를 '용안사가 단편소설의 명작이라면 가쓰라 이궁은 장편의 명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4권, p.299)

 

사진 출처 : https://www.japanhoppers.com/ko/kansai/kyoto/kanko/630/

 

 

 

"코르뷔지에! 그 동안 우리가 열심히 추구해온 모든 것이 일본의 과거 문화 속에 있다. 와서 보면 너도 아마 나처럼 감동할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르코르뷔지에에게 보낸 엽서 중)

 

"가쓰라 이궁에는 기능, 합목적성, 그리고 철학적 정신 세 가지가 함께 어우러진 건축적 미덕이 있습니다." (가쓰라 이궁의 건축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여 이를 널리 알린 독일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말)

 

브루노 타우트는 가쓰라 이궁의 아름다움에는 제각기 다른 세 가지 표정이 있다고 보았다. 우선 서원 건축처럼 일상 생활이 다름없이 영위되는 실용적이고 유용한 공간에서는 최고의 세련미를 보여주고, 또한 다실과 다실에 이르는 길에는 선禪 또는 다도에서 나오는 준엄한 정신이 서려 있으며, 그런가 하면 경사진 언덕이나 작은 폭포, 다리의 모습은 어떤 준엄한 철학적 요소보다는 마치 한편의 전원시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4권, p.324)

 

 

 

이처럼 고보리 엔슈가 다도, 건축, 정원에서 추구한 미학을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비寂' 라고 불렀다. 본래 사비란 누추한 것, 쓸쓸한 것, 가난한 것을 의미했는데 그 정신만을 간직하고 아름다운 형식으로 구현했다는 것이다. 즉 와비사비의 대중적 형식을 제시한 것이다.

 

고보리 엔슈의 이 '아름다운 사비'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가쓰라 이궁이다. (4권, p.310)

 

이 구절에서 Steve Jobs가 말한 "Saty Hungry, Stay Foolish"가 떠오르네.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 교토편은 두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번째 책 <교토의 역사>에는 헤이안 이전부터 헤이안 시대, 그리고 가마쿠라 시대의 교토를, 두번째 책 <교토의 명소>에는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의 교토를 다룹니다. 그러니까 교토의 옛날부터 오늘까지 돌아보는, 실제로는 한 권의 책입니다.

 

 

 

교토의 이야기지만,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이야기도 나오고, 일본의 역사도 나오고, 윤동주도 정지용 시인도 나옵니다. 그래도 가장 많이 나오는 건 역시 교토에 있는 건축물 이야기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물이 금각사, 은각사를 비롯해 17개라고..... ㅎㄷㄷ합니다.

 

 

 

오랜 한일 관계에서 평화로운 공존이 무너진 건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리고 근대의 100년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는 근대사 콤플렉스로 일본 문화를 무시한다고 합니다. 그대를 알면 그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어야 합니다.

 

 

 

교토에 갈 생각을 여태 왜 못했을까요? 오랜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는데 말이죠. 지금도 홋카이도나 도쿄, 오키나와를 갈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열심히 읽고 나름 감명 깊은 곳을 공부하면서 정리하기도 했지만, 열번 책을 읽어도, 머리속에 가지런히 정리해도, 한번 가서 보는 것만 못할 겁니다. 당장 유교수님의 구라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미 다자이후에서 그 구라에 속은 경험이.... ㅠㅠ 딸이랑 짐 쌀 궁리부터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