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 그리고 기록한 자 : 오영욱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이 로마로 쳐들어갔던 길을 따라
야간열차와 급행열차를 타고 두 개의 산맥을 거쳐
바르셀로나에서 이탈리아 중심부까지 진격했다.
코끼리가 넘어간 알프스를
침대칸의 이불 속에서 눈만 빠끔하게 내놓은 채
경치를 감상하며 무리 없이 지나쳤고
밀라노의 역내 카페에서
누마디아에서 온 잘생긴 남자가
자기 네 집으로 자러 가자고 했던 추파를 받아보면서도
나는 마치 애꾸눈 장군이 된 듯했다.
하이라이트는
로마행 기차에서
나보다 목 하나씩은 더 크고,
음모만 숨기듯 골반에 간신히 걸친 빽바지를 입고,
하나같이 삐쩍 마르고 가슴이 봉긋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패션모델들이
나의 전후좌우에 포진하고 앉아
그녀들의 향긋한 체내음에 반쯤 취했던 일이다.
이런 게 행복이 아닐까? (p.262)
#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베를린에 있는 유태인 박물관이다. 유대계 미국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하여 2001년에 개관했다. 저자가 말하는 '비어있는 보이드'는 보이드 자체가 사라진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쇠로 만든 얼굴 형상의 오브제 1만 여개를 바닥에 깔아 그 위를 지나다닐 때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그 소리가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 롱샹 순례자 성당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 롱샹에 있는 르 꼬르뷔지에의 대표 작품. 현대 건축의 불후의 명작이라 불린다. 울 나라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중업 선생이 꼬르뷔지에 할배의 제자였다. 그 김중업 선생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부산대 본관(현재는 인문관)의 창은 롱샹 교회의 저것과 똑같다. 프랑스 대사관의 지붕도.
8년만에 다시 찾아뵙는다고 썼다. 내가 알기로 오영욱은 95학번일텐데, 2004년에 두번째 방문이라니..... 저런 작품을 계속 찾으며 건축에 대한 감수성을 발전시켜 온 이와 그러지 못한 이의 차이는 의외로 클 수가 있다. 떠날 때는 떠나야 된다.
사진 출처 : http://m.blog.daum.net/hghwang11/16128298
# 몽생 미셸
성 Saint 미셸 Michel 의 산 Mont 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 있는 섬. 가장 꼭대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과 수도원이, 그 아래에는 상점과 주택이 있고 성 밖 가장 아래에 농부와 어부의 거처가 있는, 봉건 사회가 잘 드러나는 배치를 지녔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이자 프랑스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oksnmusic&logNo=20133232143
# 모아이 석상
경주에 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동이 틀 무렵 간 적이 있다. 꽤 오래 석탑 옆에 앉아 있었다. 혹시나 석탑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 저자는 가장 가까운 남미 대륙에서도 삼천킬로나 떨어진 이스터 섬에 오로지 모아이와 대화하기 위해 간다. 모아이 몇 발치 떨어진 곳에서 모아이가 말을 걸어주기를 종일 기다린다. 모아이가 머라 했게?
이스터 섬까지 간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꽤나 큰 열정과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오직 모아이와 한 마디 섞어보겠다는 집념으로 실행한다. 이를 '설렘'으로 표현했다. 그도 나도 언제까지 설렐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beaddoll/10156373866
# 이구아수 폭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폭포.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나이아가라와 아프리카 짐바브웨와 잠비아 사이의 빅토리아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로 꼽힌다. 수백만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자연 경관, 인류가 만든 위대한 건축, 그리고 여행에 함께 한 사람들....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다. 이 책 대부분은 저자 혼자 다녔다. 그래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보다 그가 본 자연과 건축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저자는 그런 걸 더 즐겼다.
사진 출처 : http://albertofloresg.blogspot.kr/2014/09/amazonas-laselva-tropical-amazonica-es.html
# 알함브라 궁전
일부 호사가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동양의 타지마할과 서양의 알함브라 궁전을 꼽는다. 특이한 건 둘 다 이슬람 건축물이다. 이 건물이 지어진 13세기 초는 이슬람 왕국의 황혼기였다. 이제는 저물어가는 시대에 피어난 마지막 화려한 꽃이다.
이슬람 건축가들은 건물에 자신들의 종교를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문자로도 적어 놓았다. 알함브라 궁전 회랑은 코란의 인용문을 고대 아라비아 문자로 새겼는데 '권세는 신에게 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알라악바르 (글 출처 :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저자는 그 곳에 오래 머물렀고 자기가 본 것을 스케치했다. 알함브라의 유래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다.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일본 사람으로 하루를 보냈다는 에피소드만 나온다. 이런 그의 글이 더 매력적이다.
사진 출처 : https://namu.wiki/w/%EC%95%8C%ED%95%A8%EB%B8%8C%EB%9D%BC%20%EA%B6%81%EC%A0%84
# 브라질 국회의사당
1950년대 말 브라질의 중원에 브라질리아 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실험을 한다.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로 태어난 브라질리아는 80년대 말, 도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지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도 전에 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되는 영광을 누린다. 현대국가의 미래를 지향하는 삶의 공간이라는 비젼을 제시한 도시라는 이유로. 오스카 니마이어가 설계한 브라질 국회의사당은 그런 브라질리아의 상징이다.
그러나 미래형 도시 브라질리아에 대한 현재 시점의 평가는 그리 밝지 않은 듯 하다. 저자는 "무언가 있어야 할 것 같은 할말을 잊게 만드는 도시, 그 뒤에서 허덕이는 힘을 잃어버린 대국의 가쁜 호흡" 이라고 표현했다.
사진 출처 : http://www.paraibainforma.com.br/camara-dos-deputados-escolhe-hoje-novo-presidente/
# 깜삐돌리오 광장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16세기 미켈란젤로의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기도 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 작품 깜삐돌리오 광장이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곳에서 보는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정)의 유적은 숨이 멎을 지경이라고 어느 블로거가 썼다. 오백년 전 르네상스의 위대한 인물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공간에서 저자 오영욱은 이 언덕에 앉아 그 로마를 보러 온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진 출처 : https://tanogabo.com/michelangelo-architetto/
저자는 건축을 전공하고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나도 그렇다. 그는 건설현장을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고 나는 그러질 못했다. 아니 나도 떠났다. 일본과 중국과 중동 사막의 여러 현장으로..... 세월이 흘러 그는 책을 내었고, 나는 그가 펴낸 책을 읽고 있다. 무엇이 이렇게 다른 결과를 초래했을까? 내가 가진 건축에 대한 열정이 그보다 못했을까? 내가 했던 노력이 그보다 못했을까?
누구의 삶이 더 가치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나보다 더 나았던 건, 그가 본 것, 생각한 것, 체험 한 것을 기록했고 나는 마음 한 구석에 담아 두었다. 내가 본 것, 생각한 것, 체험 한 것도 보통 사람들이 쉬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기록할 만한 여유가 없었고, 가치있는 기록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 자그마한 차이가 지금의 결과를 낳았다.
이 책은 2003년에서 2004년에 여행한 것을 2005년에 책으로 펴냈다. 그 뒤로 저자는 여러 권의 책을 냈고, 그의 블로그를 보니 지금도 여행과 건축에 관한 여러 활동들을 활발히 하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일찍 결단을 내린 그가 부럽고, 건축에 대한 열정과 감수성을 계속 발전시겨 독창적인 캐릭터를 만든 점이 부럽고, 예쁜 배우 엄지원을 마누라로 만난 것도 억수로 부럽다.
하지만, 버뜨, 시까시, 인생은 아직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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