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질꼬질 희희락락 그리고 뭉클함 : 박민우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훈자는 반년 장사다. 봄, 여름, 겨울. 이렇게 딱 세 계절이 있을 뿐이다. 시월부턴 눈이 쌓이고 길이 언다. 가을이 너무 짧아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겨울 훈자는 그래서 텅텅 빈다. 많은 이들이 도시로 가 겨울을 난다. 봄 여름 바짝 벌어야 하는데, 오월의 식당엔 공짜 살구를 씹는 여행자뿐이다. 장사가 안되면 어디든 지옥이다. 안산의 치킨집도, 신촌의 호프집도, 훈자도 지옥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건 의미가 없다.
여행자가 즐거운 건 얄팍해서이다. 속속들이 안다면, 해맑을 수 없다. 명동에서, 인사동에서 흥분한 외국인 여행자들이, PC방의 실직한 50대 사연을 알 필요가 없다. 1백 장의 이력서를 돌리고도, 2백 장, 3백 장 이력서를 더 써야 하는 젊은이들을 딱해할 필요도 없다. 여행자는 씨앗 호떡과 계란빵을 먹으며, 셀카를 찍으면 된다. 다만 며칠을 머물고, 겉을 핥고, 돈을 쓰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밥벌이에 큰 기여를 하는 존재고, 없었던 활력과 새로움을 보충해주는 존재다. 훈자를 '알기'보다는 모르고 싶다. 미래가 없는 훈자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떠나야 한다. 더 깊이 알기 전에, 마음 아파지기 전에. (p.449)
그렇지. 여행자들이란 그런 존재지. 철저히 겉만 핥는 존재. 더 깊이 알기 전에 떠나는 존재. 박민우의 글을 꼬질꼬질 희희낙낙하지만 여행자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가난하고 소심한 여행자를 따라 나는 인도와 훈자를 다녀왔다.
사진 출처 : http://tripalgogaja.tistory.com/62 (훈자의 정경)
친구 갑수는 지 입으로 지가 우리나라 3대 여행작가라고 한다. 그럼 나머지 두 명은 누구야? 그건 몰라! 그럼 내가 찾아주지. 이리저리 인터넷을 굴려봤으나 3대 여행작가는 안 나온다. 그럼 내가 정해볼까?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이지상이다. <혼돈의 캄보디아 불멸의 앙코르와트>를 지은 양반이다. 여행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람의 딸 한비야도 있겠고, 여행하는 건축가 오기사 오영욱, <여행생활자>의 유성용, 사랑에 대한 산문을 여행과 함께 쓰는 이병율 등. 아, 꼽기 힘드네. 사실 내가 아는 여행작가는 이들이 다다. 그리고 이 책을 쓴 박민우를 만났다.
박민우는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를 썼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남미와 아시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바이블로 불리는 책이라고 한다. 가난하고, 솔직하다 못해 꼬질꼬질하고, 소심하지만 발랄하고, 황당하고 따뜻한 작가의 수다가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박민우 인생 사진인가. 얼굴엔 벌써 '나 여행가요. 그것도 꽤 유명한.' 이라는 내공이 묻어 나온다. 1973년 생이고 고려대 국문과를 나왔다. 영국에서 1년 동안 유학엘리트에 유학까지.... 얼굴과는 영 딴판인데.을 했다고 하는데, 그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현지인을 오히려 나무라는 배짱의 소유자다. 그렇지. 내 영어가 후지다고 나를 자책할 게 아니라 네이티브 주제에 못알아 듣는 지들 잘못이지. 왠지 코드가 맞다.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 유명 작가가 되고 강연과 방송 출연 의뢰가 쏟아지자 방콕으로 숨어서 한달에 3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작가 소개에 나온다. 낙천적인 글이 그의 얼굴을 닮았다. 인도와 파키스탄 훈자의 여행기인 이 책은 벌써 그의 열 번째 책이라고.
사진 출처 : http://egloos.zum.com/bandinbook/v/5602373
함피의 일과는 자전거 타기와 눕기였다. 삐걱거리는 자전거로 땀을 뻘뻘 흘리다 보면, 그늘을 찾게 되고, 그늘이 있는 카페에 기어들어가 아픈 사람처럼 몸져눕고, 끙끙 신음 소리를 내면서, 째지는 만족감을 수줍어하곤 했다. (p.130)
사람들은 내 글이 솔직해서 좋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솔직함은 의무가 됐다. 한심하게 부들거리는 나도 다 까발려야 한다. 나는 크로아티아 여자와 마주치는 게 두렵다. 마주치게 되면 눈인사도 하고, 몸은 좀 어떠냐고 담담히 묻기도 하겠지. 입술은 떨릴 것이고 후회될 말만 나불댈 것이다. 얼마나 늙어야 능글맞아지고 단단해질까? (p.161)
중국인이나 한국인에 비해 일본인은 이민을 가도 안 뭉친다. 변변한 일본인 마을도 거의 없다. 현지인들에 섞여 현지인이 된다. 전부를 던지는 셈이다. 불안하지만, 그 불안까지 받아들이는 과감함이 있다. 무섭다. 그렇게 몰입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간다. 되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고 싶다. (p.201)
마음이 가난하고 보잘것 없을 때, 좋은 여행자가 된다. 가난한 마음엔 넣을 게 많아진다. 벌레를 생명체로 존중하고, 멀쩡한 사람한테까지 아프냐고 묻는다. 푸쉬카르로 간다. 못생긴 사람한테만 길을 물을 것이다. 줄 게 없나 주머니를 뒤적일 것이다. 안 주겠지만, 주겠다는 마음은 빈 주머니에 담고 다닐 것이다. 가보지도 못한 푸쉬카르가 벌써부터 그립기만 했다. (p.239)
이게 뭐야! 내가 있는 공간은 의심이 필요했다. 웅장함과 소소함이 신의 비율로 배합되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전망이 훌륭하다는 어딘가에 있을 별 다섯 개 호텔이 궁금했다. 천국이 보이는 내 방은 하룻밤에 250루피(3천원)였다. (p.403)
여행작가 박민우의 블로그 : https://blog.naver.com/modiano99
요즘 여행기의 대부분은 사진과 함께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려는 과장된 문장의 연속이다. 그게 아니면 시덥잖은 에피소드가 넘쳐나던가. 물론 그 나라의 문화를 진지하게 공부하고 받아들이려는 여행기도 있긴 하다. 여행을 다녀와서 자신만의 경험으로 한 권의 책을 낸다는 건 정말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모든 이는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있고. 하지만 그 많은 여행 책들중에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박민우의 책은 솔직하다. 너무 솔직하다 못해 여행의 피곤함과 찌질함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글이 뭐 이래? 라고 할 때쯤 뭔가 한 방 훅 들어온다. 솔직함 속에 묻어나는 여행자의 본질과 따뜻한 눈길이 강력하다. 자신의 여행을 이처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글은 처음이다. 박민우의 글은 그래서 재미있다.
가난하고 찌질하고 소심한 전문 여행가가 다녀간 인도는 내가 경험한 인도와 많이 달랐다. 직장인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연차 9일에다 하루를 더 붙여서 무려 10일 동안 남부 인도에 갔더랬다. 박민우의 130일과는 비교도 안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인도를 보았고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인도를 경험했다. 나는 가난하고 시간이 많은 여행자가 아니었기에, 저자가 경험한 인도는 전혀 다른 인도였다.
이제 미뤄두었던 나만의 인도 여행기를 써봐야겠다. 그의 글과 같이 솔직하게, 그러나 내가 본 전혀 다른 인도를.
PS.
파키스탄의 훈자. 저자의 글에서 훈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훈자여야 하는 사람. 말려도 소용없는 사람'이 가는 곳이다. 아무나 쉽게 갈 수 있는,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니다. 예전에 중동에서 일 할 때, 파키스탄 애들이 무척이나 많았었는데. 일과를 마치고 체력실에서 운동도 함께 하고 막 그랬는데. 그 땐 '훈자'가 애들 이름인 줄 알았는데.
책에서 훈자는 무려 남미대륙 전체와 비교되는 곳이었다. 파키스탄의 자그마한 동네가 말이다.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무려 24시간을 버스로 간다. 세계의 어떤 무서운 놀이기구보다 아찔한 고개길을 달달거리는 버스로. 호기심이 막 동하지만, 아직은 내겐 너무 아득하고 먼 곳이다. 하지만 체씨가 그랬던가.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 정도는 가져라고. 훈자는 그런 곳이다. 혹시 누가 알런가. 마음 속에 오래 가지고 있다 보면 이루어지기도 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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