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스산하거든 여기로 떠나리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편>
경북 영주에 아내의 절친이 살았다. 영주하면 부석사가 아닌가. 안양루에 보는 풍광이 울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유교수가 말씀하신 그 부석사말이다. 부석사를 지나 꾸불꾸불 고개를 넘어 한참을 가다보면 남대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진짜 산골짝 동네다. 거기에 아내 친구의 삼촌이 집을 짓고 살고 계셔서 몇 번인가 놀러 갔더랬다. 남대리에서 또 그 만큼의 고개를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한쪽은 아름다운 길 영춘가도가 있는 충청도 단양의 영춘면으로 가고, 다른 한쪽으로 가면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 묘소가 나온다. 경상도와 충청도, 강원도가 만나는 곳이다.
당시만 해도 오가는 차를 구경하기 힘들었던 그 길을 오래된 누비라에 아장아장 걷던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다녔었다. 주말마다 나갔다. 근데 지금은? 거의 안다닌다. 아이들은 이제 훌쩍 커버려서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구경하기도 힘들다. 아내도 자기 일이 생기고 난 뒤부터는 나랑 안놀아준다. 주말마다 일정이 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열심히 다니는 것도 참 한때다. 다닐 기력이 없어 집에서 산수화를 감상하는 것이 누워서 노닌다고 하여 와유臥遊라는데, 이 책으로 와유해라고 선생은 말했는데, 나도 벌써 그 지경이 된 건가.
그 한때에 유구라 교수의 책을 들고 다녔다. 어디갈지 몰라하는 해메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길라잡이였다. "야 요기 가서 저걸 보는 거야. 저거를 볼 땐 말야, 이렇고 저렇고 하니.... 그렇지, 딱 거기를 잘 보면 돼!"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그랬었는데..... 오랜만에 선생의 우리 땅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글을 보니 박차고 나가고 싶은 욕구로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 한때 열심히 다녔던 남대리에서 조금 더 가면 이 책에서 소개한 남한강의 아름다운 유적과 땅이 기다린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뻔질나게 다녔으나 그 쪽은 아직 많이 가보지 못했다.
마음이 울적하거든 옛 절터로 떠나라고 선생은 말했다. 나는 이 책을 들고 남한강의 여러 동네로 떠나련다. 와유하기엔 아직 이르다.
# 요선정과 마애여래좌상
요선정이 있는 자리는 본래 암자였기 때문에 불상과 탑이 남아있다. 정자 옆 큰 바위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고 마애불 앞에는 조촐한 오층석탑이 있다. (p.29)
사진 출처 : http://homenaje.tistory.com/category/?page=12
정자와 탑과 마애불이라. 주천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보이는 요선정과 조촐한 탑과 복스럽고 해학적인 마애불의 오손도손 콜라보가 반갑고나.
# 징효대사 탑비
징효대사 탑비는 스님의 일생을 증언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비문을 쓴 이가 최언위라는 사실에서도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비석을 말하자면 최언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비석의 금석학적 가치를 반도 전하지 않는 셈이다. 징효대사의 탑비에 세겨진 비문은 이 절집의 인문학적 가치를 밝히 드러내주고 있다. (p.53)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ecnoon/676
고려 건국이 918년이고 최언위가 신라말 사람이니, 이 탑비은 적어도 천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이다. (근데 저런 탑비는 우리나라에 널렸다. 그래서 천년이 넘게 자리를 지켜온 저 비석을 보고도 그냥그냥한 비석으로 여긴다.) 보령 성주사터에 가면 낭혜라는 중의 업적을 쓴 진짜 늠름하게 잘 생긴 탑비(국보 제8호 낭혜화상탑비)가 있는데 그 글도 최치원이 짓고 이 냥반이 썼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징효대사의 나이 75세 되던 해 제자들을 불러놓고는 "삼계가 다 공하고 모든 인연이 전부 고요하도다. 내 장차 떠나려 하니 너의들은 힘써 정진하라."고 당부하고 앉은 채로 입적했다 한다. 법력이 높으신 분이 돌아가실 때 나오는 아주 평범한 장면이다. 고승은 다 이렇다. 근데 이게 가능한겨? 나 죽어 하고 앉아서 죽는게? 졸라 궁금하다.
# 노산대에서 바라본 서강 풍경
노산대는 청령포에서 가장 높은 절벽으로 서강과 동강이 만나기 위해 치달리는 모습이 아련히 펼쳐진다. 굽이굽이 맴돌아 나아가는 우리나라 특유의 강변 풍광은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이 제격이다. (p.78)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snowlove78/13758155
유홍준 왕구라 할배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었지롱. 저기서 본 서강과,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가는 길에 잠시 머무른 곳 선돌. 그 아름다운 풍광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 정순왕후 사릉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는 죽어서도 단종 곁에 묻히지 못하고 남양주 사릉에 모셔져 있다. 사릉은 조선 왕릉 중 가장 조촐하고 고즈넉하여 사람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p.97)
사진 출처 : http://library.ioneis.com/sketch/bbs/board.php?bo_table=sketch_2&wr_id=5&page=
아, 죽어서도 같이 있지 못하고, 무인석 병풍석 난간석도 없는 애잔한 사릉. 왕후의 무덤을 보러 가는게 아니라 왕후의 그 많은 사연을 보러 간다.
# 한벽루
청풍문화재단지의 하이라이트는 청풍 관아의 누각인 보물 제528호 한벽루로, 흔히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남한의 3대 누각으로 꼽히는 희대의 명루이다. 이 사진은 20년 전(1995년)에 찍은 것이다. (p.119)
사진으로만 봐도 그 아름다움과 늠름함이 흘러 넘치는구나. 평양의 부벽루도 무지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우선 여기가 먼저다.
# 단양 적성
적성 북쪽 정상을 향해 올라가자면 포물선을 그리며 멋지게 돌아가는 낮은 성벽 너머로 소백산맥 준령이 겹겹이 펼쳐진다. 특히나 겨울철에 가면 하얗게 눈 덮인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나목들의 행렬이 굵고 긴 선을 그리는 것이 산수화를 그릴 때 쓰는 준법을 보여준다. (p.186)
트레킹을 꿈꾼다. 얼마전 친구가 안나푸르나 일주일 트레킹을 떠났는데 얼매나 부럽던지. 근데 돈 들여서 멀리 해외로 트레킹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이런 곳도 훌륭하지 않은가. 책에서 배우던 여인의 젖무덤과 같은 산들은 트레킹 코스로 제격이다.
# 도담삼봉
도담삼봉은 남한강이 크게 S자로 휘돌아가면서 강 가운데 봉우리 세 개가 섬처럼 떠 있어 '삼봉'이라고 했고 섬이 있는 호수 같다고 해서 '도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한강 물줄기가 만들어낸 최고의 명장면이다. (201)
사진 출처 : http://www.chungjutour.co.kr/fplace/pichtml/dodamsambong1102_pic.html
이 도담삼봉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려 선생은 1897년에 울나라를 여행한 이사벨라 비숍의 여행기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의 글을 인용했다.
한강의 아름다움은 도담에서 절정을 이룬다. 낮게 깔린 강변과 우뚝 솟은 석회 절벽, 그 사이의 푸른 언덕배기에 서 있는 처마가 낮고 지붕이 갈색인 집들이 그림처럼 도열해 있는데 이곳이 내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반가웠다. 나도 비숍의 그 책을 읽었더랬다. 이 구절은 전혀 기억나질 않지만....ㅎㅎㅎ 한번 찾아봐야겠다.
# 향산리 삼층석탑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마을 한가운데에는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이 있다. 높이 4미터의 전형적인 하대신라 탑으로 단아한 형태미를 잃지 않고 보존 상태도 비교적 완전한 편이어서 보물 제405호로 지정되어 있다. (p.227)
시골 동네에 남아있는 이런 탑들이 나는 너무 좋다. 예전에 감은사지 3층 석탑 옆에서 한참이나 앉아있었더랬다. 탑이 말을 걸어주지는 않았지만, 탑을 바라보며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도 그저 좋았다. 나는 탑 옆에서 종일도 있겠다. 책 한 권 손에 있으면 더 좋구.
# 온달산성
위 사진 : 온달산성은 서쪽으로 돌아야 제맛이다. 그리고 동쪽 성벽에 이르는 순간 누구든 아! 하는 감탄사를 발하고 만다. 성벽은 산비탈을 타고 포물선을 그리며 동벽은 앞면, 북벽은 뒷면을 엇갈려 보여주며 힘찬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그 아래로 남한강은 더욱 푸르고 길게 펼쳐진다. (p.244)
책 표지 사진이다. 인터넷 디비보니 다 나온다. 십여 년 전 올라갔더랬다. 아무도 없어 덩그러이 황량했던 온달산성이 기억에 남아있다.
# 죽령역
죽령역은 문을 닫았지만 조촐한 역사가 잘 보존되어 있어 고맙고 안심이 되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보아도 시골의 작은 간이역 건물은 소박하고 즐겁다. (p.258)
사진 출처 : http://wildbirder.tistory.com/131
울 동네에도 있다. 저런 간이역이. 낙동강역이라고. 근데 잘 안봐진다. 봐야 아름답고 소박하고 즐거운데....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높이가 9미터로 훨칠하게 클 뿐만 아니라 높고 넓은 토축 위헤 모셔져 있기 때문에 더욱 안정감도 있고 거룩해 보인다. 보호 철책도 토축 바깥쪽으로 넓게 둘러 있어 감상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안목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든 처음 이 탑을 보는 순간 저렇게 멋있는 탑이 제천 시내에 있고 그것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p.265)
사진 출처 : http://lifeee.tistory.com/1488
진짜 놀랬다. 엥간한 탑들은 가봤는데..... 제천에 저런 아름다운 탑이, 그것도 모전탑이 남아있을 줄이야.
# 중원 고구려비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2미터, 폭은 55센티미터, 두께는 33센티미터이고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었다. 발견 당시 행정구역이 중원군이었기 때문에 '중원 고구려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충주 고구려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p.313)
사진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938381
비석의 내용은 우리 고구려가 우째 여그까지 내려왔제이~~ 여그는 우리 땅이고 신라 너 내랑 사이좋게 지내제이~~ 뭐 이런 거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훨씬 윗쪽에 있다. 순수비라는게 둘러본다는 순수巡狩인줄 이제 알았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신라땅이여, 넘어 오지마! 이런 의미의 비석인 거다. 고구려의 비석이 충주에 있고 신라의 비석이 북한산에 있는 이유가 그러하다.
# 신경림 생가 앞의 느티나무
중원 고구려비에서 멀지 않은 연하리에 신경림 시인 생가가 있다. 오래전부터 남이 살고 있지만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가 지금도 변함없이 자라고 있는데 신경림 시인의 <더딘 느티나무>와 <다시 느티나무가>라는 시는 바로 이를 두고 읊은 것이다. (p.320)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 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 중앙탑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다시 느티나무가 / 신경림
중앙탑공원은 근래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이름이고 본래 이곳은 충주시 중원군 가금면 탑평리이다. 강변 한쪽 들판에 우뚝 서 있는 이탑은 '탑평리 칠층석탑'이라고 불리며 일찍이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 전성기에 세워진 것으로 동시대에 유행한 삼층석탑과는 달리 7층 구조이고 높이도 14.5m로 가장 높다. (p.324)
사진 출처 : http://think-5w1h.tistory.com/403
탑이란 본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축조물이라 법당 앞에 놓이기 마련인데, 이 탑은 그거와는 상관없이 기념비적인 곳에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다. 저렇게 높고 삐쭉한 것이 그 탑의 성격을 나타낸다. 아마도 탑이 세워질 무렵에는 하이라이즈 건축이었음에 틀림없다.
# 거돈사터
절터를 내려다보면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야외무대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싶어진다. 반듯하게 구획된 넓은 절터에 삼층석탑과 불상 좌대가 중앙무대처럼 느껴지고 한쪽 구석의 느티나무와 비석이 절터를 감싸주듯 서 있다. (p.355)
http://cansa2da.tistory.com/130
거돈사터 한쪽 모서리에 원공국사 탑비가 있고 승묘탑은 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다. 언젠가 산이와 함께 용산국립박물관 뜰에서 본 승탑 중의 하나가 그것인 거다. 아, 그렇구나.
# 비두리 귀부와 이수
이 돌거북을 보는 순간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동일신라 이래로 무수한 비석이 돌거북 받침으로 되어 있지만 비두리 돌거북처럼 능청맞게 고개를 돌려 비석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드물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놈이 무겁게 내 등 위에 있느냐? 라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다. 대단한 유머 감각이다. (p.383)
어떤 이는 비문에 무엇이 쓰여있나 보려고, 또 어떤 이는 머리돌의 이무기가 잘 있나 싶어서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다고 한다. 저 돌거북을 만든 조상들의 이런 해학은 따라갈 수가 없다. 우리 애들의 반응을 꼭 듣고 싶네.
# 문막 반계리 은행나무
아쉬움이 있다면 이 은행나무가 수나무인지라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은 내가 답사객들에게 그것을 아쉬움으로 말하자 곁에서 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던 동네 어른이 내 말을 가로채면서 나섰다. "이 은행나무가 수나무라는 건 맞는 말이여. 그래서 은행을 맺지 않는다는 것도 맞는 말이여. 그러나 이 은행나무가 있어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은행나무 암컷 100여 그루가 실한 은행을 맺고 있느니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감. 서운키는 뭐가 서운하단 말이여!" (p.402)
그 촌로의 일갈 이후 유교수는 답삿길에 남의 동네 가서 아쉽다느니 어디 있는 무엇에 비해 못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무릇 모든 사물은 그 쓰임새가 있다. 우리가 자세히 모를뿐. 그래서 결론은 겸.손.해.야 된다. 인생도처유상수.
# 고달사터 승탑
기단부의 용트림을 보면 여기서는 머리를 정면으로 곧게 내밀고 양 날개를 편 듯 입체적으로 묘사된 반면에 원종대사 승탑에서는 다소 평면적이다. 몸돌의 문짝에 자물통을 세긴 것이나 창살무늬 사천왕의 부조도 여기가 훨씬 또렷하다. 상륜부의 비천상도 여기가 참으로 아름답고 율동적이다.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 그리고 디테일이 훨씬 우수하다는 인상을 받고 이것이 국보와 보물의 차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크기도 3.4미터로 우리나라 승탑 중 가장 크다. (p.412 )
고달사터 승탑은 국보 제4호다. 응? 상당이 빠른데. 1호는 숭례문, 2호는 원각사지 십층석탑까지는 알겠는데, 그 뒤는 모르겠다. 국보 제3호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고 제5호는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라고 나온다. 앞에 소개한 중앙탑이라 불리는 탑평리 칠층석탑이 국보 제6호다. 참고로 북한의 국보 1호는 평양성이고, 일본의 국보 1호는 교토 고류지(광륭사)에 있는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며, 중국의 국보 1호(라 불리는 것)는 청명상하도라 불리는 옆으로 졸라 긴 그림이다.
# 여주 신륵사
외국의 손님을 모시고 하루 동안 우리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보고 싶다고 할때 나는 마치 준비라도 해두었다는 듯이 다음의 두 코스를 권한다. A코스는 서산 마애불, 보원사터, 개심사, 추사고택을 둘러보는 것이고 B코스는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 효종대왕 영릉, 고달사터, 신륵사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두 코스 모두 우리나라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폐사지의 역사적 정취, 그리고 편안하고 정겨운 한옥의 맛을 골고루 즐길 수 있다.
(중략) 특히 어디가 좋았냐고 물어보니 A코스에서는 예상대로 개심사를 최고로 꼽았고, B코스에서는 의외로 신륵사를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뜻밖이다. 내가 B코스를 추천해주면 내국인은 대개 신륵사가 뭐가 좋으냐고 되묻곤 하는데 정작 외국인들은 그곳이 풍광에 매료되더라는 것이었다. (p.419)
사진 출처 : http://www.yeoju.go.kr/culture/content/view/2/menu/2641?contentIdx=253&lang=cn
그런 신륵사가 절집의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일주문을 거대하게 세우고 고찰의 모습을 잃어간 것이며 4대강 사업으로 강월헌 건너편 은모래 백사장이 사라지고 고수부지 석축에 자전거길만 휑하니 있는 것에 유교수는 너무 안타깝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신륵사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후손들이 그 모든 시행착오를 언젠가는 바로잡아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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