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아드리아 바닷가를 볼 수 있을까? : 이정흠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중 오직 한 편만 고르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붉은 돼지>를 꼽습니다. 아름다운 아드리라해를 배경으로 하늘을 나는 사나이들의 모험,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라며 온갖 후까시를 잡는 허당끼의 포르코,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 마담 지나와의 아련한 사랑, 그리고 카토 토키코의 오리지날 사운드트랙까지..... 남자의 로망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어, 그런데 마담 지나가 살고 있는 그 아름다운 아드리아 바닷가는 어디 있나요?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와 맞은 편 발칸 반도 사이의 바다를 아드리아해라고 합니다. 영화의 배경은 이탈리아지만, 그 풍경은 아무래도 발칸의 동유럽 어디쯤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크로아티아의 스티니바코브라고 어느 블로그에 써놨군요. <붉은 돼지>는 여러 번 봤는데, 그때마다 영화에 나오는 멋들어진 풍광을 보러 가봐야지 라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군대를 갓 제대한 청년이 그 시절(이 책은 2008년에 나왔다)만 해도 남들이 잘 안가던 동유럽을 여행합니다. 동유럽을 가게된 까닭은 군대에서 본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에 묘사된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동유럽은 그의 로망이 됩니다. 왜? 라고 물으면 구체적인 답을 할 수 없으나 왠지 안가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감정 말이죠. 그래서 그는 체코에서 불가리아까지 40일간의 여행을 다녀옵니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데, 그는 여행기를 쓰고 심지어 책으로 냈습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한 이 청년이 지금은 무엇을 할까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지금은 방송국 PD로 일을 하고 있군요.
스스로 소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의 눈에 비친 동유럽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동유럽을 걷던 청년는 무엇을 배우고 느꼈을까요? 인상적인 책의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체코 프라하 카를교
나는 프라하에서 카를교를 제일 좋아한다. 카를교 위에는 많은 것이 존재한다. 청소를 하고 기념품을 파는 살아있는 노동과,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그림을 그리는 생동감 넘치는 문화가 공존한다. 혼자 다리 위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는 외로움과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의 로맨스도 떠다닌다. (p.39)
사진 출처 : http://travelbible.tistory.com/484
체코 올로모우츠 카페 87
편안한 카페 분위기, 혀를 자극하는 초콜릿 파이, 그리고 줄리 델피. 카페 87에서 세 시간을 보냈다. 아마 카페 폐장이 아니었다면 두세 시간 더 게으름 피웠을 게 틀림없었다. 계산을 하는데 정확히 99로쿤이 나왔다. 1로쿤을 돌려주는 줄리 델피에게 양 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1로쿤은 우리돈으로 44원이었다. 줄리 델피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청바리 주머니에 동전을 쏙 넣더니 찡긋 윙크를 했다.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다. (p.77)
사진 출처 : https://www.muo.cz/budte-v-kontaktu/verejna-soutez-na-provozovani-cafe-87--2380/
폴란드 바르샤바 바르샤바 봉기
시인이자 바르샤바 봉기에 참여했던 바친스키는 1944년 독일군 저격수에 의해 구시가에서 살해당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바친스키처럼 살해된 폴란드인은 유대인을 포함해 6백만 명에 이른다. 1944년에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 때 사망한 바르샤바 시민만 20만이 넘고 추방된 사람은 70만 명 이상이었다. 가이드북에는 이런 역사적 비극을 기리는 기념비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안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겹겹이 쌓인 폴란드 역사의 비극을 무심히 지나치면 내 폴란드 여행이 반쪽짜리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p.94)
사진 출처 : http://www.hani.co.kr/arti/PRINT/801583.html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낮의 두브로브니크가 깊은 맛의 와인이라면, 해질녘 두브로브니크는 달콤하고 낭만적인 맛의 아이스크림이었다. 지금까지 이만큼 비너스의 축복을 받은 도시를 본 적이 없었다. 두브로브니크의 갈매기 떼는 황혼이 짙어지자 날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갈매기 떼와 노랗게 물든 두브로브니크의 조화가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플라차 거리의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랗게 물든 두브로브니크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는 지상의 천국이었다. (p.262)
사진 출처 : http://www.82cook.com/entiz/read.php?num=1786394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 스타리 모스트
스타리 모스트는 정말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다리였다. 화려한 장식도 없이 심플하기 그지없는 이 다리는 정말 아름다웠다. 다리를 이루는 1,088개 하얀 빛깔의 돌은 스타리 모스트에 순백의 고결함까지 더했다. 하지만 우엇보다 이 다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주변과의 근사한 조화였다. 푸른 네레트바 강을 중심에 둔 채 동쪽의 모스크, 터키식 건물과 서쪽의 유럽식 건물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조화로운 그림이었다. (p.295)
사진 출처 : http://hankookilbo.com/mv/23e6e5fbc21d4550a85c90526f6816d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갑자기 가슴이 벅차왔다. 바로 이곳이 야스나가 요네하라를 데리고 간 곳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건너편 베오그라드의 오스만 제국군을 감시했다는 답이 우뚝 솟은 언덕에서 멀리 베오그라드가 한눈에 보였다. 제문 구시가의 늘어선 붉은 지붕과 노비 베오그라드의 현대식 건물이 만들어내는 신구의 조화, 유유히 흐르는 다뉴브 강과 멀리서 흘러오는 사바 강의 만남, 그리고 두 강의 만남 가운데 자리한 칼레메그단 성벽의 아릿한 모습. 멀리선 본 칼레메그단 성벽은 붉은색이 아니라 하얀색이었다. 잠깐의 착시였지만 그곳에는 정말 '하얀 도시'가 있었다. 맙소사! (p.341)
사진 출처 : http://www.doopediat.com/11_Menu/TravelView?ptm_idx=150630000011034
불가리아 벨리코 투르노보
이 도시에서 가장 특별했던 시간은 또다시 쏟아지는 비를 피해 멍하니 벤치에 앉아 있던 삼십분의 시간이었다. 내 옆으로 백발의 노인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정겨운 대화 소리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묘하게 조화를 이루니 한없이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이들에게 경계 같은 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서로서로 아는 사이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손을 흔들고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아이에게는 할머니의 안부를, 할아버지에게는 손녀의 안부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분명 그랬다. (p.396)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milub23&logNo=130173656025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여행지에 대한 자신만의 정보가 가득합니다. 바르샤바 봉기(나치 치하에 있는 폴란드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얻기 위해 1944년 독일과 제대로 맞장을 뜬다. 결과는 무참한 패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바르샤바는 폐허가 된다. 우리도 그러려고 했으나 못했다), 종교와 민족을 통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하나로 만든 초대 주석 티토, 그리고 그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일어난 내전 등, 사람과 장소가 의미하는 배경을 찾아 나름대로 해석하고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감정이 치우친 과한 수사도 별로 없습니다. 글이 담백합니다.
20대에 그가 본 것은 아주 선명했을 겁니다. 온전히 몸과 마음에 흡수가 되었겠지요. 그리고 저자의 그 경험은 그가 살아가는데 분명 좋은 밑거름이 되었을 겁니다. 나도 그랬다.
책을 다 읽으니, 동유럽의 그가 걸었던 골목길이 삼삼해집니다. 그의 여정을 따라 그가 본 것을 나도 보겠지만 20대가 보는 것과 40대가 보는 시각은 또 다르겠지요. 그가 경험한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나의 감정으로 느껴보고 싶습니다. 참, 그러보 보니 마스터 키튼이 자신의 꿈을 찾아 정착한 곳도 바로 루마니아군요. 도나우 문명이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마을 제코바 말이에요.
막내에게 함께 가볼까? 라고 물으니 "적금 같은 거 들어놨어요?"라고 도리어 저에게 묻습니다. 얌마, 니가 할 소리냐? 그러면서도 선심 쓰듯 좋다고 합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가기 어려우니 가본 이의 책을 읽습니다. 읽으니 더 가고 싶구요. 막 부채질을 하는 군요. 이번 생에 가 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렇게 책만 읽다 끝나버리는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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