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과 함께한 한 청년의 통과의례 : 리모 김현길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여행은 너무 먼 미래보다는 현재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현재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굉장히 행복하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청년이 있었다. 한때는 만화가가 꿈이었지만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대를 갔고,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삼성전자에 취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잘못되어 가는 걸 깨닫는다. 계속되는 야근과 밤샘, 자신의 생활이 없는 삶, 다른 이는 행복하게 사는데 왜 나만 이토록 불행한거지?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걸까? 오랜 고민 후, 그는 기득권을 포기하기로 한다.
3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그는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그동안 피폐해지 자신을 치료하기로 한다. 그는 드로잉북 앞에 앉았을 때 편안함을 느꼈다. 간단한 도로잉 도구만 챙겨 유럽으로 떠난다. 오로지 그리기 위해 떠난 여행. 38일 동안 유럽을 돌면서 에펠탑을 그렸고 몽생미쉘을 그렸고, 가우디의 건축을 그렸고, 두오모 성당을 그렸고, 합스부르크 왕궁과 바츨라프 광장, 아야 소피아를 그렸다. 그림은 그에게 일종의 치유였다. 그 그림들을 모아 이 책을 냈다.
스위스 베른
노르웨이 성모마리아 교회
헬싱키 트램
홍콩 목콕의 빨간택시
홍콩 스타페리
티베트 남쵸
티베트 포탈라 궁전
슬로바키아 브라타슬라바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추르륵 봤다.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이 책 외에 <드로잉 제주, 2016>와 <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 2017>등 두 권의 책을 더 냈다. 몇 번의 전시회를 가졌고, 여러 곳에서 드로잉 강사로 활약 중이다. 인터넷 상에서 보여지는 그는, 적어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살 때보다는 더 행복해보인다. 지금 하고 있는 그림 일이 더 가치있어 보이기도 하고. 여기에 올린 그림은 모두 그의 블로그에서 퍼왔다. 좋은 그림은 사진보다 더 많은 말을 건넨다.
제주도 비자림 <인간과 자연의 숲>
제주도 사려니숲길 <완벽한 산책>
제주도 송악산 <제주의 여름 꽃 수국>
제주도 안덕계곡 <안덕계곡의 봄>
제주도 오조리 <B일상잡화점>
제주도 한라선 윗세오름 <신들의 계곡>
그의 글은 여타의 여행기와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담담하고 밋밋하다. 하지만 소박한 그의 그림은 빛난다. 배경 사진으로 찰칵 찍고마는 사진과는 달리 그림을 그리려면 앉아서 몇 시간이고 그 대상을 바라봤을 터. 잠깐 보고 휙 스쳐가는 풍경을 오래오래 붙들어맨 그 감상은 분명 다르다.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된 그림을 통해 또 다른 풍경을 본다. 그림이 빛나는 이유다.
서울 광희동 광희문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수원화성 화서문
명동성당
위의 모든 사진 출처 (저자 블로그) : https://www.rimo.me/
언뜻언뜻 불안과 희망이 교차한다. 왜 그러지 않겠나.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뛰어들려는 청춘인데. 여행의 막바지에, 여행이 끝나고 마주할 현실에 대해 은근히 겁도 났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아닌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걸 여행중에 이미 깨달았다.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는 지금이 가장 빛나는 순간임을 말이다.
이 책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한 청춘의 통.과.의.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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