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절망과 기도 그리고 리처드 파커 :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나는 227일간 버텼다. 내 시련은 7개월 넘게 계속되었다.
바쁘게 지냈다. 그게 생존의 열쇠였다. 구명보트에서, 또 뗏목에서, 언제나 할 일이 있었다.
"예수님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크리슈나 신이여...." 소년은 단지 신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동시에 믿기 시작합니다. 주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 종류의 신들과 만나 가까이 지냅니다. 하지만 신들의 가호는 잔혹하리만큼 계획적입니다. 이 세 종류의 신이 한꺼번에 불행이라는 선물을 뿌립니다. 가족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던 배는 폭풍우를 만나 좌초되고 구명보트엔 소년과 다리 다친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앞 발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만 한' 리처드 파크라는 이름의 뱅골 호랑이가 남게 됩니다.
하이에나는 병든 얼룩말을 먹고 오랑우탄도 죽이고, 소년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 리처드 파크는 하이에나를 순식간에 처리합니다. 그리고 남은 건 소년과 호랑이 뿐. 태평양 한가운데, 의지할 것은 작은 구명보트 하나, 그리고 호랑이..... 발 밑에는 상어가 다니고 폭풍우가 쏟아집니다. 소년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호랑이가 죽고 자기만 살아남는 절망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과 먹이를 준비합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호랑이와 단둘이 보트에 남겨진 소년 이야기
실제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혹은 머리 속에서 지어낸 이야기일까요? 그렇다면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일까요? 어디까지가 그들의 능력의 끝일까요? 인간이 상상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극한은 어디일까요? 우리 안의 어떤 유전자가 이 같은 재능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물려줄까요? 그리고.... 이 소년과 호랑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넓고 가 보고 싶은 곳은 여전히 많습니다. 그리고 인도라는 곳은 미지의 곳입니다. 정말 가보고 싶으나 쉽게 가지지 않는 곳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인도 남부의 타밀나두 주의 폰티체리 라는 도시입니다. 주인공 소년 파이는 이 곳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는 집의 아들로 태어나 사자의 울음소리가 자명종이 되고 수달과 아메리카 들소의 인자한 눈길을 받으며 등교하고 동물들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표정과 함께 성장합니다. 그러던 중 혼란스러운 인도 정세에 불안을 느낀 아버지는 동물원을 접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하고 태평양을 건너면서 이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행자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보다 경험할 수 있다는 인도를 올 여름에 가 보려고 합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한 친구가 결혼을 한다는 연락에 무리를 해서라도 갈 예정입니다. 타밀나두의 이웃인 케랄라 주의 라니라는 곳입니다. 설레입니다. 그래서인지 소설 전반부에 나오는 인도의 시골 도시 모습은 반갑습니다. '폰티체리' 라는 도시 이름도 왠지 정이 갑니다.
작가인 얀 마텔은 캐나다 태생이지만 성인이 된 후에 이란, 터키, 인도 등지를 순례하며 경험 무슨 경험? 혹시 그거? 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소설로 2002년 맨 부커상을 탔고, 책은 부커상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리고 '와호장룡'의 이안 감독이 2012년 영화로 만듭니다. 책을 읽고 바로 영화도 봤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시각화된 영상물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영화보단 원작인 소설이 더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저는 영화도 꽤 좋았습니다. 몽환적이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상이 소설의 극적 스토리와 버무러져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크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편에서는 리처드 파크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크 덕분이었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친구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극한 상황에서 그들은 훌륭한 공생관계를 보여줍니다. 그 시점에서 리처드 파커의 심경도 들어봤으면 좋겠지만, 으르릉~~~~ 에 대한 해석은 작가도 불가능한가 봅니다. ㅎㅎ 보트에서의 일상에서 젤 중요한 것은 물론 자신과 리처드 파커의 먹이 구하기가 주된 것이지만, 꼭 빠지지 않는 것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우리의 일상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꼭 어느 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도 말입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나옵니다. 얼룩말과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호랑이가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선원과 요리사와 엄마가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가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보다 훨씬 충격적입니다. 어느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어느 것도 한편의 소설입니다.
영화에서 '엄마', '아빠' 라고 파이가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엄마~~ 아빠~~ 라고 외칩니다. 아니? 언제 한국말을??? ㅋㅋㅋ 파이가 사용한 타밀어는 우리말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단어가 많다고 합니다. 음... 그렇군요.
내 가장 큰 바람은 - 구조보다도 큰 바람은 - 책을 한 권 갖는 것이다. 절대 끊나지 않는 이야기가 담긴 책.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시각으로 모르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책.
지치고 지루한 보트위에서의 생활에서 파이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말입니다. 완전 공감입니다. 끝이 없는 여행길에 끝나지 않는 책을 갖는 다는 건 보물과 다름없습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책은 우리의 인생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스스로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요.
아이 셋과 자전거를 타러 좀 멀리 나갔습니다. 막내가 좀 힘들다고 중얼중얼거립니다. 둘째 딸이 동생에게 한마디 합니다. "어제 그 영화에 나오는 파이 못 봤나? 호랑이하고도 살더라 아이가!" 아이들에게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파이가 들려주는 독특한 삶의 여정에 귀 기울이면서, 지금 내가 겪는 절망을 치유하고 싶다. 누구나 빠져나가기 힘든 두려움의 터널 속에 있는 것을. 파이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을 잊지 말라고, 신을 잃지 말라고 가르쳐준다. 그 여정의 끝에 만나게 되는 땅. 힘겹게 육지에 닿았으나 그 순간 다시 잃게 되는 무엇. 또다시 이어지는 삶. 정말 긴 여정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아름답다. - 역자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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