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행복, 절망과 희망 사이의 균형 :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
내가 여행에서 겪은 인도는 회색이었다. 그 어떤 것도 한마디로 정의하기 불가능한, 알파와 오메가가 모두 섞여버린, 그래서 표현하기가 힘든 회색빛의 뿌연 그 무엇이었다.
이 세상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빌어먹을 멍청한 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신은 공평함과 불공평함의 개념이 있는 걸까? 신은 간단한 대차대조표조차도 읽지 못하는 걸까? 마넥이 만났던 하녀, 뉴델리에서 죽은 수천 명의 시크교도들, 그리고 손목에서 빠지지 않는 카라를 차고 있던 불쌍한 택시 운전사에게 생긴 일들을 볼 때, 신이 회사의 경영자였다면 오래전에 해고 됐을 것이다. (p.846)
읽는 내내 '적절한 균형' 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쓰였다. 무엇에 대한 적절한 균형일까? 저자는 이 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 걸까?
인도의 초대 총리 네루의 딸이자 자상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지닌 인디라 간디의 가장 암흑기라 할 수 있는 국가비상사태의 1975년, 재봉사인 이시바와 옴프라카시, 그들을 고용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디나와 디나의 집에 하숙생으로 들어온 대학생 마넥, 이 네 사람의 인생을 그린 소설이다.
이시바와 옴은 카스트 신분 속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가촉 천민 출신으로, 재봉사로 도시에서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마넥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도시로 나왔지만, 그의 눈에 비친 인도는 절망 그 자체였다. 디나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오랜 시간을 미망인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만, 여성으로서 독립된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이 네 사람이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며, 서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위안을 얻는다.
소설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다양한 실험의 결과물이라고 했던가. 주인공과 그 주변의 인물이 보여주는 버라이어티한 불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국가비상사태라는 미명하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가난한 대학생, 그저 사람답게 살려는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민을 학살하는 이웃들과 관리, 빈민굴 판자집조차 빼앗기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 개인의 생식 능력까지 통제하려는 국가,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녀들, 힌두교도들의 시크교도에 대한 무시무시한 탄압......
엄청난 두께의 책에서 서로에게 의미를 찾고 행복했던 것은 그들이 같이 살던 잠깐의 시절 뿐이었다. 읽는 내내 주인공들이 행복하기를 빌었건만, 저자는 나의 바램을 어떻게든 외면한다.
그런데 희한한건 이러한 불행이 어딘지 낯이 익다. 조금만 시간을 뒤로 해 보면 바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불행과 다름이 없다.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행되는 이러한 국가적 사회적 폭력 앞에서, 개인은 떨어지는 잎사귀보다 더 연약한 존재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개인들은, 끝내 파도를 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 운명의 파도에 몸을 내맡기는 이도 있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 속에서 조그만 희망의 끈을 붙드는 이도 있다. 파르시 출신의 작가 로힌턴 미스트리는 인도 근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하는 개인들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오로지 '이야기' 극사실적인 '묘사'만으로도 이토록 훌륭한 소설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증명했다. 무수히 많은 종교와 신들이 무수히 많은 계급의 인간들과 용광로 같은 현실을 함께 살아가는 인도의 현실때문일까? 단순히 작가가 천재이기 때문일까? 이 위대한 소설이 인도 작가의 인도 소설이라는 점이 놀랍고도 어쩌면 당연하다.
이 책을 손에 들고 부드러운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으면서 당신은 혼잣말로 이 책이 재미나겠다고 할 겁니다. 그리고 엄청난 불행에 관한 이 이야기를 읽고 난 후에도 당신은 식사를 잘 할 것이고 본인의 무감동에 대해서 작가를 탓하고 그의 지나친 과장과 상상의 비약을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주십시오. 이 비극은 허구가 아니라 모두 진실입니다. (p.8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중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균형은 무엇일까? 높은 신분의 사람과 하층민 사이의 균형? 다수가 믿는 종교와 몇몇 사람들이 믿는 종교 사이의 균형? 돈이 있는 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균형? 국가의 강압적인 정책과 그에 항거하는 개인 사이의 균형? 상식과 몰상식 사이의 균형? 개인과 국가, 그리고 역사 사이의 균형은 무엇일까?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아 균형을 맞추려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려 애쓰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적응력과 한계를 나는 본다.
희망이야 항상 있죠. 우리의 절망에 균형을 맞출 만큼 충분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끝장이죠. (p.803)
추천의 말에 나오는 피코 아이어의 '내 인생 최고의 소설' 이라는 단언은 굳이 필요없다. 그저 읽어보라고 꼭 한번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인도의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보편성을 다룬 우리의 이야기이다. 책을 덮은 지 오래되지만 먹먹함으로 아직도 어지럽다.
인도라는 나라가 다시 보인다. 예전에 스쳐 지나갔던 인도의 모습들이 새롭게, 친근하게, 그리고 연민으로 다가온다.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인도 여행기를 이제야 시작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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