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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이야기

절제와 여백의 작가 아다치 미츠루의 초기 걸작 : 아다치 미츠루 <미유키>

by 개락당 대표 2017. 9. 24.

 

 

 

절제와 여백의 작가 아다치 미츠루의 초기 걸작 : 아다치 미츠루 <미유키>

 

 

 

히로시마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현장의 대빵은 미와 소장이라는 분인데 이 양반이 술을 엄청나게 좋아했습니다. 이 분이 자주 가시는 사이죠 시내의 스나꾸가 있는데 술집 이름이 미나미였습니다. 저도 가끔 따라가다 보니 마담과 말을 트는 사이가 되었죠.

 

 

 

어느 날 술집 이름이 왜 미나미(남쪽)냐고 물었습니다. 니시(서쪽)도 있고 키타(북쪽)도 있고 히가시(동쪽)도 있는데 말이죠. 마담이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만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너무 이쁘고 사랑스러워 가게 이름을 미나미로 지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나미는 그 만화의 여주인공 이름입니다. 연유를 알고 나니 가게가 더 이쁘고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술집의 마담이 만화의 여주인공 이름을 따서 가게 이름을 지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가 터치입니다. 아다치 미츠루의 초기 만화이면서 인기 작가로 만들어 준 일등 공신이자, 열혈 청춘 야구 만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감성 스포츠 만화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만화다. 아주 복잡하고 슬픈 장면을 심플하게 묘사하는 그의 데생이 놀라울 따름이다. 쌍둥이 형제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이런 게 만화지....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본에서 고교 야구를 주제로 한 만화가 상당히 많은데 그 장르에서는 단연코 으뜸이다. 극 속 이야기를 이끄는 캐릭터는 누가 뭐래도 여주인공 미나미다. 아이들에게도 읽게 하고 싶지만 집에 있는 건 일본 원작뿐이라....

 

 

 

 

쿠미니 히로, 타치바나 히데오, 아마미야 히카리, 코가 하루카 등 속칭 4H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그들의 숙명의 대결을 그렸다. 그림은 세련되어 지고, 아다치 미츠루 특유의 여백과 여운은 더 성숙해졌다. 아름답고 순수한 청춘들의 열혈 야구 이야기 속에 서로의 사랑과 우정은 더욱 미묘해지고 아련해진다. 엔딩을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은 작가 특유의 묘미이다.

 

 

 

 

중2때까지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 중에서

 

이 만화가 델리 스파이스의 <고백>이란 노래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다치 미츠루의 덕후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림 출처 : http://egloos.zum.com/forshyo/v/2306307 

 

 

 

우리 딸 들이도 만화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종이 만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핸드폰에 아주 열중하고 있는데 뭐하는 지 보면 웹툰을 보고 있다. 웹툰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웹툰보다 훌륭한 만화가 우리집에 얼마나 많은데..... 집에 가면 들이보고 꼭 한 번 봐라고 해야지.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웹툰이 길들여진 우리 아이들이, 은유과 간결함 그리고 절제된 대사와 인물들의 표정과 주위의 풍경으로 묘사된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가 담긴 이 만화에 얼마나 반응할까?  

 

 

 

 

 

 

 

 

첫 눈에 반한 그 소녀는 바로 나의 동생이었다.

 

 

 

뭐 하나 잘 하는 것이 없는 평범한 고딩 와카마츠 마사토는 두명의 미유키와 얽히게 됩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같은 반 카시마 미유키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뚝 떨어진 이복 동생 와카마츠 미유키가 그 주인공입니다.

 

 

 

마사토는 친구인 카시마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사는 미유키와는 사이 좋은 오누이이기도 하지만 피가 전혀 섞이지 않는 남매라는 걸 마사토는 알고 있기에 다른 감정도 품고 있습니다. 다만 그걸 드러내지는 않지요. 그 두명의 미유키 사이에서 여러 에피소드를 겪으며 마사토는 자신의 진심이 말하는 대로 이끌립니다.

 

 

 

"<미유키>는 독신 시절에 그린 마지막 작품이거든요. 망상력이 아직 건강했을 무렵이랄까...(웃음) 혼자서 멍하니 망상을 하는 시간이 아직 있었을 때였습니다. 결혼을 하면 아무래도 현실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만큼 상상력을 발휘하기 여렵습니다. '그 집 남편, 또 바보 같은 만화를 그렸대요.'라는 말은 듣기가 싫으니까요." (5권 아다치 미츠루의 인터뷰 중에서)

 

 

 

1980년에 이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터치보다 더 초기작입니다. 그래서 만화의 전체적 분위기도 뭔가 80년대스럽습니다. 카시마가 공부를 훨씬 잘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재수까지 해서 덜떨어진 남친과 같은 대학에 들어간다든가, 집에서 커피는 항상 미유키가 탄다든가, 수학여행을 교토로 간다든가.... 뭔가 모르게 지금과는 다른 복고풍이 전체적으로 흐릅니다.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 중에서 열혈 스포츠 이야기가 빠진, 아주 드문 순수 멜로물입니다. 10대의 순수함과 사랑의 감정이 감추듯 드러나듯 합니다. 그래서 40대의 제가 받아들이기엔 좀 오그라드는 장면도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가 특유의 암시와 여백,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반전은 여전합니다. 작가의 말대로 "망상력이 한창일 무렵"의 아다치 미츠루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 사랑과 우정의 아슬아슬함과 그 줄타기와 균형감각과 여운을 즐기고 싶다면, 시간을 들일 가치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