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집밥 한 끼 : 이가라시 다이스케 <리틀 포레스트>
들아, 영화 머 하는고 좀 봐봐. 보러 가게.
음, '리틀 포레스트'요.
머하는 영환데?
시골에서 음식 해먹는 영화라고 하는데요....
보러 갈까?
그렇게 재미있을 것 같진 않은데여, 잔잔한 영화 같아여.
여보야는 어때?
나가기 귀찮은데.....
토요일 저녁에 집에 갔다 일요일에 올라오는 빡빡한 여정에 영화를 보자곤 하였으나 피곤에 절어서 방바닥과 등이 한 몸이 되어서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아이랑 아내랑 볼까말까 실랑이만 하다 방바닥과 작별하지 못해 결국 영화를 보지 못하고 일터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근데, 그 영화가 은근히 맘에 걸렸습니다. 도시의 생활을 접고 시골에 혼자 내려와 혼자 농사를 짓고 그걸로 맛나는 음식을 해먹는 영화라..... 저, 이런 영화 무지 좋아합니다. 근데, 원작이 있댑니다. 그것도 만화가요. 혹시나 해서 서점에 들었더니 책이 있었습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리틀 포레스트>였습니다.
잘 그린 듯 못 그린 듯 그림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표지 그림이 꽤 매력적이지 않나요? 풍경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토호구 산간 지방의 작은 마을 코모리, 도시에서 귀향한 이치코가 밭을 메고, 눈을 치우고, 장작을 패고, 잡초를 뽑고, 감자를 심고, 산에서 두릅을 땁니다. 그리고 요.리.를 합니다. 수유 잼을 만들고, 히츠미라 불리는 수제비도 만들고, 감주를 담그고, 무 타르트를 만들고, 멍울풀 토로로를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합니다. 본격 요리 만화입니다.
아침 식사로, 갓 딴 두릅과 민트로 튀김을 만들고 계란 후라이에다 크레송에 마요네즈을 얹어 어제 만든 바게트 빵에다 끼워 한 입 덥석 베어 먹습니다. 아..... 한끼의 품격이 후덜덜합니다. 맞습니다. 본격 요리 만화. 근데, 이게 요리 만화긴 한데, 언뜻언뜻 가시가 보입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사는 이치코에게 "실은 가장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그것을 속이기 위해 그때그때 '열심히' 해서 얼버무리는 느낌이 들어. 사실은 도망치고 있는 거 아냐?" 라고 유우타가 말하는 장면이랄지, 어릴 적 엄마의 요리에 대해 정성을 좀 들이라고 말했는데 막상 해보니 정말 정성을 들여 만든 요리라는 걸 알게 되는 장면, '아무리 피곤해도 나는 혼자라 전부 스스로 다하니까 시키는 주제에 바쁜 척 대단한 척 하지 마요' 라고 외치는 장면 등에서는 이치코의 내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나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기도 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는 토호쿠의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자급 자족하며 지낸 작가의 실제 체험을 나타낸 작품이라고 합니다. 책에 나오는 여러가지 요리도 대부분 실제 자신이 만든 것이구요. 그림 속 들과 산과 하늘의 풍경이 아름다와서 배경이 궁금하는 차에 찾아봤습니다. 토호쿠라면 일본 동북지역을 말하는데, 코시히카리의 아키다현(아키다의 산왕이라 슬램덩크에 나온다. 코시히카리보다 더 유명해졌다) 혹은 아오링고의 아오모리현 정도일까 생각했는데, 이와테현 오슈 지방이라고 나옵니다. 이와테는 일본에서 가장 넓은 현이자 가장 넓은 시골이라고 합니다. 만약 토호쿠 지방에 간다면 이와테로 정해버렸습니다. ㅎㅎㅎ
책을 읽은 이튿날 바로 혼자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영화는 요즘 삼시 세끼를 꼬박 사 먹는 밥과는 달리 담백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영화의 스토리도, 영화의 풍경들도, 영화에 등장하는 요리도 모두 담백했습니다. 인위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내가 자랐던 시골과, 나의 시골 집과, 어릴 때 먹었던 음식과, 내 나이 또래의 엄니와 아버지, 손주 며느리와 함께 살았던 할머니, 엄니가 키우시던 돼지들, 집 옆의 함박 꽃밭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골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광, 고향 친구들, 엄마와의 추억, 심지어 오구까지 영화에 나오는 모든 것이 주인공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혜원이 만드는 음식입니다. 제철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 예쁜 그릇에 담아 한 끼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걸로 허기를 달랩니다. 허기 뿐 아니라 영혼까지 달래질 듯한 요리입니다.
배추 잎 하나를 통째로 부치는 배추 부침, 선풍기 앞에서 먹는 오이 콩국수, 엄마의 오리지널인 줄 았았는데 알고보니 오코노미야끼였던 양배추전, 오일 파스타에 하늘하늘 봄꽃을 뿌린 봄꽃 파스타.... 아, 이건 참을 수가 없네요. 이치코의 요리는 아무래도 일본 요리라 쨔파티 무타르트 정도가 해볼 만한 요리인데, 혜원의 요리는 모두 만들어 먹고 싶습니다.
자신이 직접 기른 재료들로 제대로 만들어 맛나게 담아내는 한 끼의 밥. 먹을 사람(나 혼자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을 생각하며 만드는 과정도 힐링이며 그 정성을 음미하며 먹는 것도 힐링이다. 이 정도면 인생의 고수다.
해답을 찾으러 고향에 돌아온 혜원, 자신만의 확고한 해답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재하, 모두 돌아갈 곳이 있다. 지치고 고달픈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돌아갈 곳. 코모리, 리틀 포레스트, 우리 말로 작은 숲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그들은 다시 출발할 수도 있다.
응? 마지막 짤은 영화에선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저런 장면이 나왔던가? 저 책도 첨 보는데? 식구들이랑 다시 보면 확인해 봐야겠다.
위의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서울에서 잘 살지 왜 내려왔냐는 은숙의 물음에 혜원은 배가 고파서 내려왔다고 대답합니다. 나는 단박에 알아버렸습니다. 혜원의 허기를요. 나도 그렇거든요. 밖에서 먹는 아무리 맛나는 음식이라도 집에서 먹는 김치와 누룽지 한 그릇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혜원이나 나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한 겁니다. 마음의 허기를요. (콩국수에 배추전을 맛있게 해서 아내랑 아이들이랑 함께 먹고 싶군요. 집에 가면 꼭 해 먹을 겁니다.)
뭐, 사는 게 별게 있겠습니까? 맛나는 거 정성껏 해서 마음 맞는 사람이랑 얼굴 맞대고 함께 맛있게 먹는 거, 혹은 혼자라도 그걸 제대로 음미하면서 먹는 거, 그런게 제대로 사는 거 아닐까요. 책과 영화는 내게 그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PS
그리고 일본판 영화
요리가 마구마구 하고 싶어지는 리틀 포레스트 일본판
에잇, 일본판도 보고 싶어라. 하시모토 아이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는 여름, 가을, 겨울, 봄 편이 각 1시간 정도의 짧은 영화로 제작되어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하루에 한 편씩 보았습니다. 원작에 아주 충실하게 만들었지만, 코모리의 아름다움은 만화보다 더 제대로 표현되었고, 이치코의 농사일도 매우 사실적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요리가 마구 하고 싶어져서 손이 근질근질 해집니다.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만든다." 영화 포스트에 나와 있는 문장입니다. 힘는 논일을 끝내고 그가 하는 대사는 '식혜나 먹을까'가 아닌 '식혜나 만들어 볼까'입니다.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마음을 담아 만듭니다. 그리고 이치코는 정성껏 만든 요리를 제대로 음미하며 먹습니다. 뭉게뭉게 우러나는 만족감을 그의 얼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작물을 기르고, 그 작물로 요리를 만들고, 만든 요리를 먹는, 그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제대로 즐깁니다. 혼자 사는 지혜가 가득합니다.
오리지널 만화와 우리 영화, 그리고 일본 영화까지. 마음이 뭔가 すっきり(일본어 발음 슷키리 : 산뜻한, 상쾌한, 후련한, 깔끔한) 해졌습니다. 어느 것이 더 재미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각기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만화와 각 영화가 주는 울림도 다 다릅니다. 그 다름을 맛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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