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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이야기

산책,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 : 다니구치 지로 <산책>

by 개락당 대표 2018. 7. 13.

 

 

 

산책,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 : 다니구치 지로 <산책>

 

 

 

- 뭐가 좀 잡히나요?

- 글쎄, 뭐가 잡힐까. 난, 그저 이 자리가 좋아서 나와 있어요.

- ....

- 날이 좋으면 여기 앉아서 낚시꾼 흉내만 내고 있죠. 이왕이면 아무것도 안 잡히는게 좋아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편이 나아요. 이만하면 됐잖소. 느긋하게 쉬면 그걸로 됐어요.

- 느긋하다.... 느긋하다.... 하아

 

 

 

 

 

 

 

- 가끔 떠나고 싶을 때가 있어

- 나한테서?

- 아니, 아니. 매일 아침 눈을 뜨기가 괴로울 때가 있다는 거야. 현실을 떠나서 영원히 꿈속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지.

- 아직 소녀 같은 구석이 있네?

- 그런가?

 

 

 

 

 

 

저는 인간이나 동물이 원래 조용한 생명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큰 소리를 지르거나 야단스럽게 우는 사람을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없듯이

인간은 은밀하게 살아감으로써 자신을 지켜왔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가지 걷기 중에서도 산책은 무엇보다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목적도 없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역시 산책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죠. 걸음의 보폭이나 걷는 속도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산책을 제대로 즐길 수 없습니다. 때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목적 없이 산책하러 나서면, 어찌된 영문인지 그 순간부터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합니다. 저절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기도 하죠. 흐르는 구름을 보면 편안한 느낌이 들고, 길가의 잡초나 돌맹이를 보면 또 다른 감정이 솟아나기도 합니다. 산책은 어쩌면 작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맛볼 기회라는 생각도 듭니다. (작가 후기 중에서)

 

 

 

 

 

 

이 만화에 나오는 대화를 다 모아도 한두 바닥이 채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스토리도 단순합니다. 갈등? 그딴 거 전혀 없습니다. 그저 주인공이 동네를 어슬렁 거닙니다. 만화는 그가 다니는 길과 집과 산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그게 다입니다. 책을 넘기는 게 마치 무성 영화의 장면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근데, 주인공은 주로 혼자 산책을 다닙니다. 가끔 그의 개와 함께 나가기도 합니다. 가족이 있는데도 말이죠. 혼자 산책해도 즐거워 보입니다. 주인공의 눈에 비친 주변 풍광과 이웃들이 모두 반짝입니다. 숨이 죽어있던 식물이 내리는 비에 활기를 되찾듯 주위의 사물은 주인공의 시선이 닿으면 활기를 찾습니다. 저도 즐겨 걷는 편이지만 혼자 걷는 건 별론데, 주인공은 다르네요. 별 재미없는 중년인줄 알았던 주인공의 내공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아~ 산책하고 싶어라. 당장이라도 신발 끈을 묶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다니구치 지로 (1947~2017)

 

 

 

얼마전 일본의 먹방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 한국편'이 방영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주인공은 전주의 한 가정식 백반집에서 청국장과 비빔밥을, 그리고 용산에 있는 숯불갈비집에서 돼지갈비를 먹었다고 합니다. 저도 가끔 잼나게 보는 드라마라 흥미가 갔습니다. 어떤 집이길래 고로상이 찾아갔을까 하고 말이죠. 고로상의 취향에 맞게 역시 허름하나 서민들이 즐겨 가는 식당이었습니다. 그 집들, 대박 났겠죠?

 

 

 

그 드라마의 원작이 다니구치 지로의 <고독한 미식가>입니다. 선생의 만화는 <아버지>로 처음 접했고 <열네 살>의 아련한 감동을 계기로 제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개를 기르다>, <신들의 봉우리>, <K 케이>, <창공> 등의 담담하고도 사실적인 화풍과 아련한 감성에 빠졌습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주인공이 중년의 남자입니다. 읽을 때마다 주인공과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게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가 묻어나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개를 기르는 사람이 보면 참 좋을 만화 <개를 기르다>. 제목이 '개를 기르다'지만 실제 내용은 '개가 죽다'이다. 개를 기르다보면 나이가 들어 죽는게 당연한 이치지만 죽음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만화를 통해, 열심히 살았던 충직한 개가 가족을 떠나는 여운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enterani/130103617870

 

 

 

그런 선생이 2017년 2월에 작고했다고 나옵니다. 이제야 알았네요. 선생의 작품은 아직 한참이나 더 보고 싶은데. 더 이상 다니구치 지로의 새 작품을 볼 수 없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그의 작품 리스트를 봤습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그린 <도련님의 시대>, 이정모 관장의 책에서 '맑은 향기를 머금은 따스한 정종 한 잔처럼 인생에 찾아든 사랑 이야기'라고 극찬한 <선생님의 가방>을 비롯하여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좀 있네요. 아껴두고 읽어야겠습니다.

 

 

 

늦었지만 부디 편안히 영면하시길.....

 

 

 

사진 출처 : http://comixpark.pe.kr/220933231890

 

 

 

다니구치 지로의 사망을 손석희 아나운서가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뉴스룸 앵커브리핑 2017년 2월 16일자에서 "고독한 혼밥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현재의 세태를 묘사했습니다. 읽을 만한 기사라 생각되어 옮겨봅니다.

 

 

 

'고독한 미식가'를 그린 만화가 다나구치 지로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의 만화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가 세상에 미친 영향은 의외로 크고 깊습니다. '혼밥' 즉 혼자 먹는 밥을 대중화한 이가 바로 다나구치 지로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위로받으러 홀로 맛집을 순례 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무시한 채 혼밥을 즐기는 그의 모습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혼밥과 혼술 열풍을 일으켰고 작품은 드라마로도 유명해졌지요.

 


그렇습니다. '혼밥'은 언제부턴가 처량하고 쓸쓸하고 목이 메는 슬픈 밥상은 아닌 듯 보이기도 합니다. 다나구치 지로의 작품 속 주인공처럼 고단함을 위로받으려... 혹은 시간에 쫓겨서 등등... 각자 다양한 이유들은 생겨났고 혼밥은 사람 사는 방식의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혼자 밥을 먹는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언젠가부터 같은 밥상에 마주 앉는 것이 불편한 그런 세상을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온갖 그럴듯한 이유들을 모두 동원해도 단지 '불편' 이란 하나의 단어로 수렴되는 것은 웬일일까... 겸상하려 애쓰다가 불편해지느니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는 사람들의 마음. 여기에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모순과 부조화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동의해야만 한다면 우리의 현실은 답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통계가 있더군요. 직장인이 가장 선호하는 점심 메뉴를 살펴봤더니 수년간 부동의 1위였던 '김치찌개'를 제치고 '가정식 백반' 즉 '집밥'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혼밥'이라는 단어 위에 '집밥'이라는 단어를 올려놓은 이유는 혼밥과 개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만큼 '함께 보듬는' 가치를 그리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그것은 갈라진 겨울의 한복판에서 봄을 기다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무거운 과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운 집밥 가득한 밥상. 함께 먹는 밥을 떠올리며 홀로 즐기는 고독한 혼밥의 시대.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