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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이야기

싸리문 하나 열기가, 책 장 하나 넘기기가 두려운 만화 : 권가야 <남한산성>

by Keaton Kim 2018. 10. 11.

 

 

 

싸리문 하나 열기가, 책 장 하나 넘기기가 두려운 만화 : 권가야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굴레다.

조선의 굴레다. 역사의 굴레다.

그 시대를 살다간 그들의 굴레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나는 여인을 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을 품었던 것이다.

아무도 함락시킬 수 없는 견고한 산성을 쌓으려는

혜령의 의지를 넌 보지 못했다.

짓밟힐수록 끈질긴 생명력으로 꿋꿋이 되살아나는

정복되지 않는 조선.

 

 

 

 

전쟁의 역사에서 대의명분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이 눈물이다.

그 눈물은 어린 아이의 눈물이고,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눈물이고,

겁탈당한 처녀의 눈물이고,

대의명분이 무언지 모르는, 이념이 무언지 모르는 무지한 촌부의 눈물이다.

그 눈물이 우리의 한의 눈물이다.

 

 

 

 

何事非君 何事非民

누가 다스린다고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섬긴다고 백성이 아니겠는가!

 

 

 

 

 

미운 놈을 볼라 카몬 반드시

맴 바탕에 미움이 깔리야 보인데이.

맴 바탕에 미움이 안깔리는데

워떻케 미운 놈을 볼 수 있겄노? 그쟈?

사랑하는 놈을 암만 볼라 캐도 사랑을 깔아야 보이제. 안 글나?

 

 

 

 

난리가 끝난다고 우리네에게 더 나은 세상이 오려나?

 

 

 

 

니 들어 봐라. 그기 말이다.

실은 언니는 세상에 복을 가져다주는 길상천녀이고

동생을 세상에 재앙을 내리는 흑암천녀인기라.

 

둘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상 함께 댕긴다 카이.

사람들은 길상과 흑암이 자매라지만

실상은 둘이 한몸이다 말이다.

엽전이 앞뒤가 서로 다르지만

알고 보면 둘이 합쳐 한 엽전인거 맨치로.

알겄나?

 

언니와 동생이 같은 한 사람인데도

맴이 온화하고 사랑스러울 땐

복을 주는 길상만 보이다가,

맴이 팍팍하고 표독스러버지몬

못나고 구데기 바글거리는

흑암천녀가 안 보이나 말이다.

 

내 한 번 물어보자.

덕배야. 니 눈깔에 니 마누래가

시방 어찌 보이노?

 

 

 

 

숙아.

내가 너무 작구나.

내가 너무 싫구나.

 

나는 어찌 이리도 옹졸하고 얕단 말이냐!

가족이 다 무어냐?

후사가 다 무어냐?

 

성인은 나이 들어 칭송 받을 일을 하지 못함을 싫어한다던데

장부로 태어나서 나는....

이게 무어냐?!

 

 

 

 

여인의 도리를 누가 만드시었소?

삼종지도를 누가 가르치셨소?

여인이 어찌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네 아낙들보다

남정네인 그대들이 더 잘 아시잖소?

 

 

 

 

올라갑니데이.

야소님요... 내 어린 아들 올라갑니데이.

 

올라갑니데이.

죄를 뉘우친 내 아들 야마모토

올라갑니데이.

 

지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으니

대대손손, 두고두고 지를 미워해 달라꼬한

내 아들 올라갑니데이.

 

내도 죽으면 아베도 슬플 것 같냐던

내 아들 올라갑니데이.

 

야소님요.

내 아들의 신 야소님요.

돌중이라고 부정이 없것소?

중이라꼬 눈물이 없었고?

정이 많아 그 정 끊을라꼬

중이 안 되었겄소?

 

 

 

 

아가야,

아가야.

넌 강이 되거라.

 

가뭄에 마르지 않는

끈기의 강이 되고

산과 들을 돌아 흐를 줄 아는

인내의 강이 되고

낮은 데로 찾아 흐르는

겸손한 강이 되고

생명을 키워내는

자비의 강이 되고

바다를 향해 갈 길을 잊지 않는

의지의 강이 되거라.....

 

 

 

 

 

 

슬프고 처연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숨이 꺽꺽 막혔다. 그림이, 이야기가 아프고 아팠다. 권가야 선생이 우리 역사를 읽고 울었다며 왜 그렇게 슬픈 역사인지 이 책을 통해서 풀어보려고 했다고 한다. 그 고민이 오롯이 전달되었다.

 

 

 

선생의 작품은 한국 만화의 힘이다. 이 책이 나오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임진왜란을 다룬 이 책에 이어 병자호란을 다룬 2부가 나온다고 한지 팔 년이 지났는데, 선생의 작품은 감감무소식이다. 근황을 찾아봐도 안나온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독자가 있다는 걸 선생은 알고 계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