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구요~~ : 마스다 미리 <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
이 만화의 주인공은 결혼 11년차 부부인 치에코씨와 사쿠짱입니다. 아이 없이 둘이서 살아갑니다. 치에코씨는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구요, 사쿠짱은 자신의 구두 수선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치에코씨는 일을 마치면 남편에게 들러 함께 저녁거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밥을 지어 둘이서 먹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요.
이 부부의 일상은 평범합니다. 각자 일을 하고, 함께 장을 보고, 밥을 먹고, 가끔 외식도 하구요. 때론 서로 다투기도 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소.소.한. 일상입니다. 그 소소한 일상에서 이 부부는 죽이 잘 맞습니다. 참 편안해 보이고 또 행복해 보입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결혼하고 10년쯤 지나면 서로 소 닭 보듯 할텐데, 치에코씨와 사쿠짱은 아직 깨가 쏟아지는 군요. 그 일상을 잠깐 엿볼까요?
치에코씨가 혼자 친정에 가려는 진짜 이유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딸로 지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쿠짱의 입맛에 맞는 소스의 배합 분량을 알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사쿠짱과 나뿐이구나.
배가 아주 고플 때 주먹밥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
큰 쪽을 사쿠짱에게 주고 싶습니다.
사쿠짱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리의 유명한 가게 초콜릿이라잖아요.
이런 때는 혼자 다 먹어버리는 치에코씨랍니다.
유명한 온천에 가는 것은 좋지만
제일 좋은 건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
집이 최고인 사람들은 행복하다구요.
파란 하늘 기분 좋은 바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캐치볼.
그 좋아하는 사람이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좋아하는 사람.
참으로 분에 넘치는 인생이구나.
누군가에게 응석을 부릴 수 있다는 건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약도 됩니다.
결혼하면서 예물 대신에 산 것은
"매일 이 의자에 앉아서 얘기하자."
이러면서 둘이서 고른 한 쌍의 의자입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우리 아이들이 한때 열심히 보던 허영만 선생의 <사랑해>가 떠오릅니다. 석철수와 나영희의 연애담에서 시작해서 결혼을 하고 딸 석지우가 태어나는 따뜻한 사랑이야기 말이지요. 좋은 명언들이 많이 나왔더랬죠. 홍승우 화백의 <비빔툰>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다운이와 겨운이가 태어나면서 보다 왁자지껄해지지만요. 치에코와 사쿠짱 이야기는 위의 두 책보다 훨씬 담백합니다. 그림조차두요.
결국 제일 행복한 날이란건
근사한 날이나 놀라운 일, 흥분되는 사건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
진주가 실을 따라 한 알 한 알 미끄러지듯
단순하고 작은 기쁨을 계속해서 가져다주는
하루하루라고 생각해
- 치에코가 읽는 <앤의 청춘> 중에서 -
남편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합니다. 집에서 20분쯤 걸리는 거리입니다. 퇴근하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아내도 자전거를 타고 마중을 나옵니다. 중간쯤에 만나 둘이서 함께 옵니다. 오면서 함께 장을 보고 저녁을 만들고 마주 앉아 먹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말이죠. 주말이면 둘이서 산보를 나갑니다. 외식도 하구요. 알콩달콩 사는 맛이 지대로였습니다. 치에코와 사쿠짱과 똑같습니다. 저의 신혼 시절 얘깁니다.
그랬는데....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 부모 곁을 떠나기도 하고 자기들의 일로 밤 늦게야 돌아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일이 생기고 나는 나대로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지금은, 서로 바쁩니다. 그래서 피곤하기도 하구요. 함께 있지만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화도 많지 않구요. 결혼한 지 17년 하고도 6개월이 된 가족의 평범한 일상입니다. 사랑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뭐, 하긴 이 정도 된 중년 부부가 아직도 치에코씨와 사쿠짱의 그런 생활이라면 그게 더 이상할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부럽네요. 저 부부.....ㅠㅠ
치에코는 쇼핑 카트를 미는 사쿠짱의 뒷모습을 좋아합니다. 사쿠짱이 곱게 개어놓은 빨래를 보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지수 120%가 됩니다. 이 부부는 오롯이 자기의 삶을 살면서도 함께 하는 행복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곳을 보면서 자신이 본 풍경을 서로에게 이야기해주는 부부입니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맛볼 줄 아는 이 부부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내 맘도 따뜻해져 옵니다. 근사해보이는 군요.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들이 보면 달달하기 그지 없고, 결혼한지 십수 년이 지난 부부들이 보면 신혼의 한때를 되돌려주는 만화입니다. 이번 참에 한번 시도해봐야겠습니다. 저녁 늦게 오는 아내를 마중나가서 손을 잡고 달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이벤트?를요. "와이라노? 머 잘 못 묵었나, 이 냥반이!" 뭐 이런 반응이 예상되긴 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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