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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이야기

살암 시민 살아진다 : 정용연 <목호의 난, 1374 제주>

by Keaton Kim 2019. 2. 24.

 

 

 

살암 시민 살아진다 : 정용연 <목호의 난, 1374 제주>

 

 

 

<정가네 소사>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아프고 힘든 우리 근현대사를 살아온 이름 없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인데, 작가 정용연의 가족사이기도 합니다. 읽는 이의 시선이 단 1초도 머무르지 않을 장면 하나를 위해 하루종일 매달려, 무려 7년의 작업 끝에 완성합니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와 그 여운이 꽤 오래가는 책입니다이 책을 통해 작가 정용연을 처음 알았습니다.

 

 

 

<정가네 소사>가 2012년에 나왔으니 꽤 오래되었지요. 그 뒤로 여러 매체에 짧은 만화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책을 베껴서 먹고 사는 사람인 용서인傭書人에 대한 이야기, 정약용이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옷에 그려 딸에게 선물로 준 그림 매조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아래에 소개한 조선시대 역에서 말을 돌보는 노비에 관한 이야기인 청파역, 만리재, 약현 등, 옛날 맨 바닥에 살며 고단했던 민초들의 삶을 조명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시면 작가의 단편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잠깐 감상해보시죠.

 

 

 

용서인 : http://story.ugyo.net/front/webzine/wzinSub.do?wzinCode=1008&subCode=201512

매조도 : http://story.ugyo.net/front/webzine/wzinSub.do?wzinCode=1008&subCode=201601

 

서울역 일대 역사만화 (위의 만화 청파역, 그리고 만리재, 약현 등의 단편을 만나볼 수 있다) 

: http://seoullo7017.seoul.go.kr/SSF/H/ENJ/030/03010.do

 

 

 

오랜만에 작가의 단행본이 나왔습니다. 정가네 소사 이후 7년만인가요.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ㅋㅋ. 제목은 <목호의 난>입니다. 목호의 난은 고려 공민왕 때 탐라의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을 말하는 건데요, 목호牧胡는 말을 기르는 오랑캐를 뜻합니다. 이들과 최영 장군이 이끄는 고려 군대와의 한판 싸움이 이 책의 큰 줄거리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이런 역사적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주 애월 바닷가에 있는 최영 장군, 김통정 장군의 석상과 비석을 보여주면서 책은 시작한다. 비석에 새겨진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이라는 말은 애월이 몽골에 맞서고 오랑캐를 멸망한 땅이라는 건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이 장면에서 시작했는지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고려말 공민왕와 외국인 왕비인 노국공주의 에피소드도 나온다. 세기의 로맨스다. 공민왕과의 금슬이 보통이 아니다. 적국인 원나라의 공주였지만, 공민왕의 개혁이나 반원정책을 지지했다. 말 그대로 공민왕의 정치적 동반자다. 노국공주가 죽고 공민왕은 목호의 탐라를 정벌하고자 했다.

 

 

 

탐라에 살던 목호 아이들에게 빙떡을 주는 여주인공 버들아기의 모습이다. 저 목호 아이들은 제주에서 나고 제주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 목호의 아이들은 고려 군사들에게 모두 죽임을 당한다.

 

 

 

몽골의 후손인 석나리보개와 유배 온 고려 관리의 손녀 버들아기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도 나온다. 고려에서 쳐들어온 군사들과 한판 붙으려고 전쟁에 나가는 신랑을 배웅하는 버들아기 모습이다. 섬사람들에게 고려는 자기의 나라일까? 아님 살을 맞대고 살고 있는 목호가 남의 나라 사람일까? 뭐, 그런게 대수겠는가. 그저 맘 편히 살게만 냅두면 좋을 일인데.

 

 

 

목호들이 최후의 항쟁을 벌인 범섬과, 그 범선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강정마을 해군 기지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4.3사건도 잠깐 언급되었다. 작가의 말에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위와 강정천, 고려군과 목호의 전투가 있었던 새별오름과 범섬, 4.3사건의 아픔 상처가 있는 다랑쉬오름을 이야기했다. 아름다운 제주의 아픈 제주다. 

 

 

 

삼별초라고, 왜 중학교 때 배웠던 싸움 잘하는 군대가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 최씨 무인 정권의 사병이었습니다. 근데 되게 싸움도 잘하고 하니 국군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 말 고려와 몽골이 치열하게 싸웠는데요, 싸웠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발렸습니다. 30년간의 전쟁은 마침내 고려가 백기를 들며 마무리됩니다. 무신 정권도 무너지게 되죠. 하지만 삼별초는 끝까지 저항합니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그리고 제주도까지 밀립니다. 제주도에서 김통정 장군이 죽으면서 삼별초의 난이 마무리(1273년)가 됩니다.

 

 

 

이후 원나라는 삼별초가 점거했던 제주도에 무슨 총관부를 설치해서 그들이 다스렸댑니다. 말을 기르기에 아주 적합한 땅이었던 제주를 눈여겨보고 황실의 말을 방목해 목장을 설치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제주도에 뿌리내리며 고려군에 의해 싸그리 멸망(1374년)하기까지 백 년을 살았습니다. 제주 토착민과 어울려서 말이죠. 그들이 목호입니다. 목호가 왜 생겨났는지 궁금해서 오랜만에 고려사 공부 좀 했습니다ㅋㅋ. 이 책에 다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근데, 책의 스토리가 좀 이상합니다. 응당 최영 장군의 고려군이 우리 편, 제주에 사는 몽골 오랑캐가 나쁜 편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목호가 우리 편, 고려군이 나쁜 넘이냐면 그렇지도 않구요. 그냥 담담하게 사실을 그렸습니다. 작가는 목호도 고려인도 아닌, 탐라에 사는 백성의 시선으로 그 전쟁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독자도 마찬가집니다. 영웅의 시선에서 바라본 역사가 아니라 민초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 저는 이 부분이 제일 좋았습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대개 다 이러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말이죠.

 

 

 

살암 시민 살아진다.

 

 

 

전쟁이 끝나고 고려군대는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목호 뿐만 아니라 몽골피가 섞인 사람, 목호를 도운 사람, 어린 아이 할 것 없이요. 제주 판관 하담은 자신의 일지에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가 땅을 덮었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라고 적었다고 책에 나옵니다. 당시 제주에 살던 사람 절반이 죽었습니다. 거의 학살 수준입니다. 한국판 제노사이드 4.3사건이 절로 겹쳐집니다.

 

 

 

저자가 <목호>라는 제목으로 처음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이 5년 전이라고 합니다. 책으로 내기엔 분량도 적었고 미처 담아내지 못한 내용이 많아 다시 작업을 시작합니다. 한 컷을 수정하기 위해 몇 페이지를 다시 건드립니다. 그렇게 5년의 세월과 씨름한 끝에 이 작품이 나왔습니다. 책을 읽고 목호의 난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한번 더 읽었습니다. 묻혀 있던 역사적 사실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어 알게 해준 작가가 새삼 고맙습니다.

 

 

 

살암 시민 살아진다, 살다 보면 다 살게 된다는 뜻의 제주 방언입니다. 아픈 역사 속에서도 살겠다는 사람들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살암 시민 살아진다고 되내이며 살았습니다. 시련이 있을 때마다 주문을 외웠겠지요. 이제 그 땅이 조금은 달라보입니다.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아픔을 겪은 제주의 시선으로 쬐금 옮겨졌다고 해야 할까요. 제주도는 언제나 좋았지만, 좀 다른 의미로 더 사랑스러워졌습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정가네 소사가 7년, 목호의 난이 5년 걸렸으니, 한 이삼년 뒤에는 기대해도 될까요? 네?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