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피덩 별곡,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 : 김은성 <내 어머니 이야기>
진짜 이야기가 있구나, 여기에는. 이야기에는 진짜가 있어야 하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역사고, 우리 모두가 현대사라는 것을 보여준 정말 위대한 작품입니다. 이런 책은 사라져서는 안돼요. 세상에는 사라져서는 안 되는 책들이 있어요.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강력 추천했답니다. 그런가부다 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이라고 김영하 작가가 극찬을 했습니다. 살짝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만화길래.... 책 표지를 보니 투박한 판화체의 그림입니다. 아아, 제 경험으로는 이런 소박한 그림체의 만화는 무조건 재미있습니다. 4권의 책을 차례차례 읽어나갔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난 소감은 이랬습니다. "하, 이런 책이었군요. 김영하 아자씨 고마워요, 이 책을 알게 해줘서. 정말 사라져서는 안 될 책이네요."
나 같은 사람을 그린 것도 만화가 되냐?
책의 주인공은 1927년생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이복동녀입니다. 저자의 엄마이지요. 놋새, 후쿠도조, 보천개 사램, 동주 임이, 그리고 이복동녀 등,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운명을 헤쳐온 우리 시대의 엄마입니다. 놋새는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시대지만 단란하고 금슬 좋은 부모 밑에서 귀염을 받으며 자랍니다. 태평양 전쟁이 심해지면서 일본은 조선 여성을 강제로 데려가게 되고, 그걸 피하기 위해 19살인 1945년 봄 얼떨결에 시집을 갑니다.
해방이 되지만 다시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0년 함흥 철수 때 남으로 피난오면서 실향민이 됩니다. 거제 수용소에서의 피난민 시절을 거쳐 충남 논산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6남매를 슬하에 두었는데, 김은성 작가는 막내딸이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말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으로 성장한 작가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맞물려 진행됩니다. 저자의 어머니는 함경도에서 내려온 분이라 여태 함경도 사투리를 씁니다. 아주 맛깔납니다. 어피덩이라는 말은 '얼른'의 사투린데, 주인공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 '어피덩 별곡'의 내용으로 함 들어가볼까요?
그걸(오이냉국) 먹으면 속이 이상하게 시원해. 삼씨(대마)라는 기 먹어서는 아이 될 물건이야. 그걸 먹고 나면 심이 나고, 속이 편안하고 화다분(홀가분)한 기 기분이 얼매나 좋은지 몰라.
어우!
이기 무슨 기분이지?
아! 화다분하다! (1권 p.124)
엄마도 아빠도 날고, 나도 날고, 소도 개도 날고. 대마가 들어간 오이냉국을 먹고 기분이 화다분해지는 걸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나도 먹고잡네. 삼씨가 들어간 오이냉국ㅎㅎ.
죽을 뻔한 엄마가 다 낫자 너무 좋아서, 동네이다 새로 사논 밭을 엄마 손을 꼭 잡고 도던 기억이 나. 그렇기 좋아하던 엄마였는데....
엄마!!
엄마가 그렇기 좋니야? 결혼하면 신랑이 더 좋아. 우리 놋새도 이제 시집갈 때가 됐구나이. (1권 p.222)
주인공인 놋새와 놋새 엄마의 애틋한 대화다. 딸과 엄마의 사이가 참 좋다. 놋새와 놋새의 딸인 작가의 사이도 그 못지 않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자식을 많이 낳았을 때가 오히려 부모, 자식간의 애정이 더 깊은 것 같다.
시흥이 : 나 너 집이 좋아서 너 집이 장개와야겠다.
놋새 : 너 미쳤니야?
시흥이 : 아이 미쳤다.
놋새 : 아이 미쳤는데 왜 자꾸 미친 사램 소릴 하냐?
시흥이 : 놋새야, 오빠 아이 보깁었나?
놋새 : 내가 왜 보깁어!
시흥이 : 내는 무지 보깁었는데. 놋새 마이 이뻐졌다이.
놋새 : 내 바쁘다.
시흥이 : 놋새야, 내 간다. 내 보깁어도 우지 마라이.
놋새: 아이 운다. (2권 p.35)
놋새를 좋아하는 동네 오빠 시흥이. 그 시흥이의 구애를 애써 무시하는 놋새. 놋새는 할머니가 되어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맛있는 거 해주고 같이 놀아야 하는데, 왜 그랬나 몰라." 라고 말한다. 결국 정신대로 일제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별로 맘이 들지 않는 남자와 혼인을 한다.
토지는 언제 뺏겼는지 기억 안 나는데, 우리 친정은 자작한 토지는 별로 안 뺏기고, 자작 중에서 일꾼 쓴 것, 소작 준 건 다 뺏기고.
빼앗은 토지는 한 성인 나이부터 육십 살까지 되나 6~7마지기씩 주고. 자식 많은 집은 좋아서 난리고.
우리 친정은 엄마 아버지 늙고 땅 받을 해당자가 숙자 하나야. 시집도 친정처럼 토지가 많았으나 자작한 땅이 많아서 덜 뺏기고. (2권 p.110)
김일성이 실시한 북한의 토지개혁 모습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땅을 얻은 사람들은 기뻐했고, 땅을 잃은 사람들은 낙심했고 일부는 남으로 내려왔다.
엄마, 김치 담갔어?
짐치 맛 좀 볼래?
맛있다.
통깨가 없어서 아이 놨는데 나중이 볶아서 여야겠다.
꾀도 무섭다. 여자라는 기 틈틈이 깨도 볶아놓고 마늘도 쪄놓고 그래야지, 이기 무시기야!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구십이 다 되는 내가 깨도 볶고 살림도 다 해야 아니야. 씹이 구역질을 하겠다. 하하하하.
나중에 볶아 넣고 맛있게 해놔. 안 그러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하하하하, 내 너한테 혼나고는 살지를 않는다.
좀 쉬다 해야지.
아구, 아구! 나도 좀 쉬다 해야지.
김치 담그느라 수고가 참 많았소.
그렇기 말을 해주이 다 풀리오. (2권 p.192)
딸은 엄마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그렇게 말을 해주니 다 풀렸다고 한다. 엄마와 딸의 대화가 정겹다.
흥남 부두가 남선으로 나갈려는 사람들로 백사지야. 배에 탈 수 있게 그 사이에 다리를 놨더라구. 미군이 손을 잡아서 들어올려주더라구. 그러구 배에 들어갔는데 배가 학교 운동장만하더라구. 그러니까 두고 온 엄마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나는지 그 자리에 기절해서 거제도에 내려놓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어. 정든 가족과 생이별을 그렇기 하게 된 거야. 그렇기 고향땅을 떠났지. (2권 p.214)
1950년 12월의 흥남 철수 장면이다. 그걸 실감나게 본 건 영화 '국제시장'에서다. 보천개 사람(이복동녀)도 이 때 거제도에 와서 정착한다. 저 배는 그 유명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다. 선장은 배의 무기를 죄다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많이 승선하도록 지시했다. 3천 명 정도가 정원인 이 배에 탄 사람은 무려 1만 4천 명.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실려 있다고 한다. 그 배를 작가의 어머니가 탔다. 한 사람의 역사는 한 나라의 역사와 뗄래야 뗄 수 없다.
시이 : 되기 맛있다.
동주 임이 : 시이, 이래서 남자들이 안주해서리 술을 먹는구나.
시이 : 하하하.
동주 임이 : 시이, 술이 모자라지 아이 함? 이러다 술꾼 되는 기 어렵지 않겠슴.
시이 : 동주 임이, 우리 미쳤는갵슴
동주 임이 : 우리가 여기서 술 한 병 더 사러 가면 여자가 얼큰해서 '술 한 병 주시오' 그러면 실루 웃깁겠지? (3권 p.72)
술을 먹을 줄 모르는 여자 둘이서 제일 맛나는 돼지고기 부위를 안주삼아 한 두 잔 먹다보디 다 먹어버렸다. 그러고는 마주보며 웃는다. 참 낙천적인 사람들이다. 힘든 일도 많았을텐데, 그 보다는 즐거운 일을 더 많이 그렸다. 그건 아마도 주인공이 즐거운 일을 더 많이 기억한다는 말이다.
엄마가 자는 사이에 나는 어디로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가 깨어났을 때 떠날 것이다. 엄마랑 합체도 해봤으니 이제 떠나야 할 때다. 엄마가 자는 사이, 나는 어떻게 떠날지 궁리를 한다. (4권 p.230)
엄마의 팔십 평생을 딸이 팔 년을 그렸다. 작가는 엄마의 일생을 그리면서 자신의 인생도 잘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참 좋겠다. 이런 막내딸이 있어서.
여태 배운 어떤 역사보다 감동적이다.
격동의 세월을 살다보면 한 인간의 역사는 곧 그 시대의 역사가 됩니다. 흔히 어르신들이 "아이고, 내가 겪은 일을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될거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나 굴곡진 현대사를 몸소 경험하신 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걸 책으로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힘든 걸 해낸 분이 바로 작가입니다. 진짜 네 권의 책으로 나왔습니다. 작가도 작가지만 주인공인 작가의 엄마도 대단합니다.
이복동네 할매의 기억력은 거의 멘사 회원 수준입니다. 그렇게 디테일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니. 기억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능력도 대단합니다. 어떤 에피소드들은 엄마가 해주신 구술을 그대로 써도 될 만큼 이야기 구성이 탁월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엄니도 명절이 되면 자신의 과거사를 이야기합니다. 래파토리가 다양하고 대단합니다. 하도 들어서 그 다음 무슨 말을 하실지 알 정도로 외웠습니다. 근데, 그저 귓등으로 흘렸습니다. 그 시절 다 그랬겠거니 하며. 하지만 작가는 오랜 시간을 들여 이렇게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좋은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작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참 멋진 딸입니다. 복동녀 할매도 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ㅎㅎ.
읽는 내내 맘이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김유정의 소설을 읽을 때 딱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꾸불꾸불한 우리 근현대사를 잘 살아낸 한 여인의 평생을 들여다봤습니다. 여태 배운 어떤 역사보다 감동적입니다. 널리 읽혀져야 할 책입니다.
엄마의 일생을 8년 동안 그린 김은성 작가. 세월이 흘러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런 엄마가 그리울 땐 이 책을 펼치겠지. 이 책은 사랑하는 딸이 어머니께 바치는 헌사다.
'만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희순 작사 작곡 '안사람 의병가'라고 들어보셨나요? : 권숯돌 정용연 <의병장 희순> (6) | 2020.08.15 |
---|---|
살아 있는 것과 사유하는 것은 결국 같은 거야 : 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0) | 2019.04.17 |
살암 시민 살아진다 : 정용연 <목호의 난, 1374 제주> (2) | 2019.02.24 |
아무렴, 만화는 이래야 만화지 : 맹기완 <야밤의 공대생 만화> (2) | 2018.12.14 |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구요~~ : 마스다 미리 <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 (2) | 2018.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