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화 이야기

제 자신도 어쩌지 못해서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인간들 : 최규석 <송곳>

by Keaton Kim 2018. 2. 15.

 

 

 

제 자신도 어쩌지 못해서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인간들 : 최규석 <송곳>

 

 

 

나는 노동자다. 아침 7시까지 출근하고 야근은 밥 먹듯 한다. 가끔 철야도 한다. 요즘은 바빠서 일주일에 하루만 쉰다. 쉬는 날도 다음 날 일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게 더 문제다. 그렇다고 월급을 많이 주느냐, 음, 많이 준다. 돈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심지어 숙소도 제공한다. 쉴 때도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 자기 계발비도 나온다. 이 정도면 엄청 좋은 회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어느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성과에 대한 엄청난 압박, 개인의 의견이나 판단 따위는 개무시하는 관행,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감은 늘 존재한다.

 

 

 

나는 노동자이긴 하지만 회사와 어떻게 대화하는지 모른다. 대화의 필요성도 못 느꼈다. 가장 중요한 연봉은, 협상은 커녕 회사가 지 기준으로 내 성적을 매겨서 그 근거로 맘대로 정해 나에게 사인하라고 던져준다. 때때로 평가가 낮은 동료가 짤리기도 하지만 옆에서 보는 나는 안타깝기만 할 뿐 어찌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다룬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에 대해서는 전혀 배운 바가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회사는 노동조합이 없다. 회사측에서는 너희들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잘 배려해서 그런 거는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애초부터 대화 자체를 봉쇄한 것이다. 짤린 사람은 어찌 해 볼 도리도 없이 말없이 집으로 간다.

 

 

 

최규석의 <송곳>은 그런 노동자를 그린 만화다. 법적으로 명시된 최소한의 챙기기 못하는, 갑의 횡포에 시달려도 어디 한 마디 하소연도 못하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노동자들 말이다.

 

 

 

 

 

 

외국계 대형 마트 '푸르미'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하는 주인공 이수인은 육사 장교 출신이다. "어쨌든 나는 세상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다." 라는 대사에서 짐작하듯이 자신이 속한 세상의 부당함과 부적절함에 대해 매끄럽게 넘어가지 못한다. 학교에 다닐 때도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다. 그것으로 자책하며 괴로워하지만 나름의 저항과 도피로 살아간다. 어느날, 회사에서 자신의 파트 판매직 직원을 정리해고하라는 지시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불법이라 거부하고 노동상담소 소장이자 해결사인 구고신을 만나 노동 운동에 눈을 뜨게 되고 회사의 부당해고에 대항하여 어려운 싸움을 전개한다.

 

 

 

스토리가 낯설지 않아 좀 찾아보니 2007년의 이랜드 사태가 그 모티브이다. 이랜드 그룹이 한국까르푸를 인수하여 운영한 할인점 홈에버에서 직원들을 대량 해고하고 이에 저항하여 노동자들이 500일도 넘게 투쟁한 사건이다. (염정아가 주연을 맡은 영화 <카트>의 배경이기도 하다) 만화는 노조가 만들어지고 노동자가 어떻게 연대하며 그들이 바라는 것과 회사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약자와 강자,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이분법으로 딱 나누어지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인간들이 나올 뿐이다.

 

 

 

 

그렇다. 노동운동은 선한 약자와 악한 강자의 대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작품에서 매우 구체적이며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약자는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는 그냥 평범하고 구질구질한 인간이며 그보다 더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인 강자와의 싸움이다. 대의명분을 찾기 어려우며 거기다가 생.계.가 들어가면 훨씬 더 힘들어지는 싸움이다. 노동운동의 밝은 면만이 아니라 어두운 저쪽의 면까지 아주 자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 http://m.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762&l=345268

 

 

 

"직원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보내!" 지시하면 실행하는 익숙하고 당연한 반복이 "그거 불법입니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라는 이 대사로 깨져버렸다. 주인공 이수인이다. 육사 출신의 엘리트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이 자신도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인물이다. 구고신을 만나 이 송곳은 제대로 뚫고 나왔다. 이랜드 노조 위원장을 지낸 김경욱을 모델로 그렸다. 2007년 7월 시행된 비정규직법을 앞두고 '이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지 않기 위해' 홈에버와 뉴코아에서 계산업무를 담당하던 비정규직 노동자 700여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하며 집단 해고했고, 노동자들은 파업 투쟁을 벌였다. 결국 공권력이 투입되고 강제해산 될 때까지 21일간을 싸웠고 김경욱는 이 투쟁에서 맨 앞에 섰다.

 

http://m.cnews.co.kr/m_home/view.jsp?idxno=201507130911179200700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이 간지나는 대사를 읊은 노동운동가 고구신이다. 고구신의 모델은 이수인과는 달리 여러 시대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수 명의 노동운동가를 하나로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꼽자면 하종강 선생과 송영수 선생에 가깝다고 인터뷰에 나왔다. 하종강 교수가 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 사회의 '송곳' 같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책인데 1980년대 학생운동으로 고문을 받던 송영수가 선배 하종강의 이름을 대고 평생 미안함에 노동 운동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하교수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것보다 이 만화를 읽는 게 훨씬 낫다고 했다.

 

사진 출처 :  https://brunch.co.kr/@gunbbang/8

 

 

 

오랜 기간 노동자가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 노동법이지만, 나는 노동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거의 모두가 노동자가 될 거면서 학교에서는 노동법을 가르치지 않고 우리도 그게 뭔지 전혀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에서 반드시 배우는 과목이며, 대학에서는 노사 관계의 협상까지도 필수로 가르친다고 한는데..... 설마 우리는 노동자가 안될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고등학교 국영수 한 시간씩만 줄여도 충분할텐데..... 학교를 탓할 필요도 없다. 당장 우리 회사만 봐도 그 많은 교육 커리큘럼 중에 노동법은 절대 없다. 하긴 회사가 바보냐? 그걸 가르치게!

 

사진 출처 : https://brunch.co.kr/@sungkibyung/14

 

 

 

 

 

 

<송곳>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결코 어렵지 않다. 내 노동을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받는 것,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서로 배려하는 것, 회사와 내가 다같이 잘 되는 방법에 대해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것, 옳지 않은 처우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는 것 응? 이 정도면 구글급인가? 등이다. 내가 회사에 바라는 것과 똑같다.

 

 

 

회사라는 게 본래 그런 거라고 묵묵히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건 옳지 않다 라고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다. 몰라서 그렇지 찾아보면 꽤 많다. 그들은 본래부터 송곳 같은 사람들이라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이 받는 부당함으로 송곳이 된 사람들도 있다. 주머니 속의 그 송곳이 어떻게 뚫고 나오는지 이제 겨우 알 것도 같다. 노동운동이란 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지겹고 비루하고 쉬 바스라지는 아주 약한 연결고리로 이루어지는 것인 줄도 알겠다. 그 이전의 학생운동, 사회운동,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의 그 속내도 이것과 다름 없음을 이제 알겠다.

 

 

 

서두에서 나는 노동자라고 썼다. 노동자이지만 나는 겨우 막대기의 수준이다. 비집고 튀어 나오기에는 그 끝이 너무 뭉툭한 막대기. 하지만 이 책이 그 막대기를 조금 벼린 것 같기도 하다. 이 이야기의 힘이다. 흔치 않은 주제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명작이다. 노동운동의 교과서라 불릴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