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풍지 사이로 가을 햇살이 들어오다 :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부 <한옥, 구경>
보슬비가 오면 정확히 기단 아래로 마당이 고요히 젖어 들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저녁이면 고고히 안에서부터 빛을 내며 창문들이 서 있다. 장마가 오면 심장이 울릴 정도로 큰 빗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겨울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마당 하나로 흰 눈이 가득했다. 잭 키츠의 그림 동화 <눈 오는 날>의 피터처럼 우리들은 신나게 나가 눈을 치며 놀았다. (p.15)
# 1. 대구 삼덕동 임재양 외과
한옥 병원과 일본식 주택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대구 삼덕동 임재양 외과. 구가도시건축 조정구 소장이 설계한 이 병원은 2012년 대구시 건축상 금상을 수상했다. 기존 터에 자리한 한옥과 적산 가옥을 그대로 살려 켜켜이 쌓인 시간과 도시 역사를 존중했다는데 의미가 깊다. (p.86)
바람이 불면 정원 구석에 앉아 있기 좋은 자리를, 비가 오면 한없이 마당을 내다보면서 커피 한잔 마시고 싶은 자리를 마련해달라는 등 소소한 생각들을 허물없이 이야기했고, 조정구 씨는 자신의 한옥을 짓듯 그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구체화했습니다. (p.91)
행복은 반드시 노력해야 하며 다른 누군가를 위해 노력한다면 더 빨리 행복이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담은 공간을 만났습니다. 한옥 병원과 빵을 굽는 한입 별당이 함께 하는 대구 삼덕동의 '임재양 외과'가 그곳입니다. "따뜻한 빵 만들고 있어요. 소풍 날 보물찾기처럼 행복을 찾고 싶다면 오세요, 한입 별당으로," (p.83)
위의 모든 사진 출처 : http://bosim.kr/248
# 2. 경북 성주군 아소재我蘇齎
아소재我蘇齎. 주인은 왜 집 이름을 지으면서 '되살아날 소蘇'라는 글자를 썼을까? 아소재는 자신의 원래 모습 그대로 '다시 살고 싶다'라는 집주인 엄윤진 씨의 간절한 심정이 담긴 이름이지만, 어쩌면 '소생蘇生'은 우리 모두가 집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한옥 아소재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법을 배우며 매일 '다시 살고' 있다는 엄윤진 씨의 시골살이는 집과 자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p.261)
사는 건 그렇다치고 밥벌이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도 쿨한 대답이 돌아온다. "쟁여놓은 돈? 당연히 없죠. 돈은 없는 대신 시간을 쓰면서 살면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엄윤진 씨가 생각한 것이 한옥 체험이었다. 처음에는 혼자 잠자는 게 무섭기도 하고 '심심한데 누가 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다. '별이 비처럼 쏟아지던' 날, 작은 방이 세 개 있는 한옥 한 채에 성우당星雨堂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예쁜 한지를 바르고, 난방 장치를 갖춘 후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p.269)
때가 되면 일하고, 때가 되면 놀고 그런 거죠."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삶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도, 먹는 것도, 일하는 것도, 무엇을 해도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드는 것. 이 집은 그런 '자연스러운' 삶을 꿈꾸게 한다. (p.271)
위의 모든 사진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_stay/w_stay_view.jsp?cid=2047871
한옥에서의 이러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나는 집이 어떻게 땅과 관계를 맺는지 알았고, 거친 자연 환경 속에서 사람의 삶을 보호하는 것이 집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마당이 자연의 한 조각을 가져다, 나 혹은 우리 가족과 하나로 연결해줌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다른 이의 시선도, 어떤 잣대도 없는 벌거벗은 자신과 자연의 만남이 있었다. (p.15)
# 3. 서울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
그가 아니었다면 과연 누가 우리나라 주거 문화 역사를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완성도 높게 정리할 수 있었을까? 한옥에 우리 전통 가구를 집대성한 한국가구박물관. 일찌기 전통 미학을 살아 있는 생활로 체득한 정미숙 관장이 일생의 업으로 일군 이곳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함을 알려준다. (p.235)
사진 출처 : http://korean.visitseoul.net/attractions/
한옥과 그 안에서 꽃피운 우리의 생활 문화가 아름다웠던 것은 대문을 열고 행랑채를 지나 정원을 거닐고 돌담 사이 문을 넘어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마루가 있는 본채에 다다르기까지, 한 곳 한 곳 문을 열고 닫으며 곳곳을 둘러 보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 (p.247)
사진 출처 : https://home1.kookmin.ac.kr/~craft/index.php?document_srl=15318&mid=bbs
한옥의 창호는 사람의 어깨너비를 기준으로 이상적인 비례와 크기를 찾았고, 그 안에 놓는 가구는 사람과 공간을 동시에 고려해 제작했다. 팔을 올려놓는 위치, 눈높이, 그리고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문 높이 등 사람과 공간을 기준점으로 탄생한 조선 목가구는 그래서 한옥 안에 놓고 또 한옥 안에 앉아서 볼 때 그 참의미와 매력을 이해할 수 있다. (p.234)
사진 출처 : https://home1.kookmin.ac.kr/~craft/index.php?document_srl=15318&mid=bbs
# 4. 서울 가회동 청춘재
"일단 꿈꾸고 해보면 이루는 방법이 나오게 마련이지요. 집 입구가 좁아서 대문을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문을 하나만 달았거든요. 그런데 이 문 크기가 보통 한옥 대문보다 커요. 대문이 두 짝이더라도 결국 출입할 때 쓰는 문은 하나이니, 들고 나는 입구 문만 본다면 청춘재의 대문이 더 큰 셈이지요." 구석구석 세심하게 고민해 이 한옥을 완성한 조주립 씨의 설명이다. (p.251)
한옥은 멋있고 좋은 줄은 알지만 바쁘고 여유 없는 삶을 살기에 그저 먼 일이라 치부하고 포기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하지만 청춘재의 주인장은 포기하지 말고 꿈을 꾸라고 말한다. 꿈을 꿔야 꿈을 이루는 기회가 생기는 법. 내 소유가 아니면 어떤가. 하룻밤 묵어가는 청춘재는 그 하루 동안은 온전히 내 한옥인 것을. 작지만 큰 한옥 청춘재靑春齎 이야기 (p.249)
아마 청춘재보다 작은 한옥을 만나기는 어려울 듯 싶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데 모든 것을 아쉬움 없이 갖춘 한옥을 만나기는 더 어려울 듯 싶다. 한낮부터 해저물녘까지 안방에서, 누마루에서, 마당 쪽마루에서 청춘재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작아도 한옥이기에 풍요로울 수 있음을 깨닫는다. (p.257)
위의 모든 사진 출처 : http://picssr.com/search/%EC%B2%AD%EC%B6%98%EC%9E%AC
이 책은 2007년 부터 최근까지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에 연재되었던 기사를 단행본으로 묶은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한옥 외에도 건축가 조정구 씨의 집을 비롯하여, 학고재 우찬규 대표의 삼호당, 창녕의 아석고택과 하회마을의 북촌댁, 가회동의 미음 갤러리, 부티크 한옥 호텔 취운정, 경주의 라궁에 이르기까지, 엿보고 싶은 한옥 스물다섯 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소개한 한옥들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 놓았으며 큼지막한 사진들도 함께 들어 있어, 아하, 그렇군! 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옥을 이해하기 보다 좋은 방법은 직접 가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옥에서 직접 살아보면 이 보다 더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남의 한옥을 엿보기도 하고, 책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기도 합니다.
한옥에서 산다는 건, 단순히 주거의 형태가 한옥이라는 것을 훨씬 뛰어 넘는 일입니다. 생활 자체가 한옥에 맞게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생각 자체도 한옥에 맞게 되는 것입니다. 주거의 형태가 바뀌면 생활 습관이 바뀌고, 생각의 방향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해보니 그렇습디다. 그것이 바로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옥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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