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완행열차를 타고 모리오카, 시즈쿠이시까지 가보고 싶어라 : 아사다 지로 <칼에 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요시무라 간이치로'라는 사무라이입니다. 일본 에도 막부 시대 말기 신센구미의 말단 무사지요. 시대 배경은 '보신 전쟁'이라 부르는 신 정부와 구 막부의 내전입니다. 사무라이들이 마지막 자존심을 걸고 싸웠지요. 일본 역사에서 요 시절은 무척이나 재미있습니다. 역사 곳 인물 중에서 일본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사카모토 료마를 비롯해서 정한론의 주창자이자 세이난 전쟁의 주범인 사이고 타카노리, 그리고 신센구미의 검객을 위시해서 칼 좀 쓴다는 사무라이들이 우르르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세키가와라 전투와 더불어 일본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역사의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막부 시대의 역사를 좀 찾아보았습니다.
에도 막부
막부는 무신 정권을 말한다. 천막을 쳐서 진영을 만들었다고 막부라 부른다. 그러니까 장군, 즉 사무라이가 나라를 다스렸다. 천왕은 그냥 허수아비. 에도 막부는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일가를 격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웠다. 1867년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왕에게 국가 통치권을 내주면서 끝난다. 무려 265년 동안 일본의 최고 대빵은 막부의 쇼군이었다.
메이지 유신
에도 막부가 미국의 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강제 개항하자 여기에 반발해서 막부를 타도하고 천왕을 제대로 복위하자는 세력이 등장한다. 이 세력들과 막부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크게 한판 붙는데 이걸 보신 전쟁이라 한다. 보신 전쟁에서 승리한 신정부군은 봉건 체제를 종식하여 천황 중심의 일본 제국을 만들고 서구화를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메이지 유신이라 부른다. 정확한 시기는 메이지 신정권이 들어선 1868년으로 본다.
보신 전쟁
1868년에서 1869년 사이에 신 정부군과 구 막부와의 한판 싸움. 무진년에 일어나서 무진 전쟁 혹은 무진을 일본어로 발음해서 보신 전쟁이라 부른다. 신 정부군에는 삿초 동맹이라 불리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있고 구 막부에는 아이즈번을 포함해 난부번, 에조(홋카이도) 공화국, 신센구미등이 있다. 주요 전투로는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아이즈번 방어전,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아들이 전사하는 하코다테 전쟁 등이 있다. 전쟁은 신 정부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로 인해 에도 막부는 완전히 해체되고 일본 제국이 수립되며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다.
신센구미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격변의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에서 마지막으로 조직한 교토 경호대 이름이다. 깃발의 문양은 誠인데 '마코토'라고 읽는다. 교토에는 나라의 천왕이 있고 불온한 세력(이 책에서는 사쓰마번, 조슈번)이 호시탐탐 그 천왕을 등쳐업고 정권을 쥐려고 할 때, 이를 막기 위해 막부에서 만든 특수 부대인 셈이다. 그러나 이 정쟁에서 막부가 어이없이 항복하고 '볼온한 세력'이 천왕을 업고 혁명에 성공하자, 신센구미는 결국 막차를 탄 악당이 되어 버린다. 별명은 미부로시壬生浪人, 즉 미부의 낭인이다. 미부는 교토 교외 지역의 마을 이름으로 신센구미가 처음 주둔한 동네다. 이 책의 원제는 미부기시덴壬生義士傳, 즉 미부의 의사(신센구미)들의 전설이다.
신센구미 인물
국장 : 곤도 이사미.
애검은 나가소네 코테츠. 오늘 밤 코테츠는 피에 굶주려 있다. 천연리심류의 전수자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총에 맞아 중상을 당하며 나가레야마에서 잡혀 참수형을 당한다.
부장 : 히지카타 도시조.
별명은 오니노 부쵸(귀신부장). 신센구미의 처음과 끝을 지킨 인물이다. 사카모토 료마,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일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역사 속 인물 중의 한 명이다. 보신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하코다테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설사 이몸이 북쪽 에조(홋카이도)섬 땅끝에서 썩을지라도 내 혼만은 저 동쪽에서 주군을 지키리.
1번대 조장 : 오키타 소지.
신센구미 사무라이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 소유자. 역대 사무라이로 쳐도 다섯 손꾸락 안에 들어간다. (배가본드의 주인공 미야모토 무사시도 그러함). 그리고 잘 생겼다....기 보다는 미소년에 가깝게 생겼다.
2번대 조장 : 나가쿠라 신파치
신도무념류 전수자. 오키타 소지와 사이토 하지메와 더불어 신센구미 3대 검객이다. 신센구미 조직원 중 드물게 오래 살아남았다. 이 책 처음에 신센구미에 막 입대한 요시무라 간이치로와 진검 승부를 벌인다.
3번대 조장 : 사이토 하지메
신센구미의 숙청 담당. 이 책을 영화로 한 <바람의 검, 신선조>에서는 꽤 비중있게 나온다. 오키타 소지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칼 솜씨를 지녔다고. 오키타는 용맹의 검, 사이토는 무적의 검이라 불렸다.
4번대 ~ 10번대 조장까지 있음. 이 책에서 별 비중 있는 역할이 없어 생략함.
이 소설은 서사도 서사지만 중간 중간 간지 터지는 대사가 일품입니다. 읽다가 나중에 또 읽어보려고 접은 곳이 수두룩합니다. '사내란 제 아내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힘이 나지 않는 법이야!' 크헉. 이런 문장은 도대체 어떻게 나왔을까요. 지로 할배, 이거 너무 한 거 아뇨? 다시 읽어도 울컥하는 문장을 발췌했습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사람도 죽였소. 그러니 곤도 선생, 히지카타 선생과 함께 다시 싸움판에 뛰어들어 장렬히 죽는 사무라이 따위, 나는 사양하겠소이다.
그이들도 원래는 나처럼 농사꾼도 아니고 사무라이도 아니건만, 어찌하여 죽을 때만은 사무라이라고 입에 침을 튀기는지, 나는 당최 모르겠소. (상권, p.26)
그때 요시무라가 난간 기둥머리에서 일어나 등을 꼿꼿이 세우고 중얼거린 말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어. 눈곱만큼도 제 학문을 자랑하는 기색 없이, 머나먼 북녘 고향의 큰자식에게 직접 읽어주기라도 하듯이, 그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아볼 만큼 우렁찬 소리로 이렇게 읊었어.
"공자님 말씀에, 부귀는 모두가 원하는 것이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곳에 머물지 않느니라. 빈천은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나, 그것이 비록 정당하게 얻게 된 것이 아닐지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느니라." (상권, p.103)
신센구미 동료들은 나를 두고 돈벌이 나온 낭사라고 숙덕였다. 수전노라 했다. 그래도 나는 내 행동이 무사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 무사의 의무란 민초의 삶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야. 가장 먼저 돌봐야 할 민초는 내 아내와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님은 인을 말하고 의를 말하셨지만, 인간의 도리는 가장 먼저 처자식에 대한 인과 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더냐. (상권, p.132)
나는 진작부터 아가씨를 진심으로 사모했습니다. 내가 이와테 산이라면 아가씨는 히메가미 산입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 이미 부친을 여의고 형제도 없으며 몸값이래야 이타 이인부치의 말단 무사지만, 앞으로 검을 연마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가문을 일으켜, 언젠가는 아가씨를 귀하신 집안의 안주인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나에게 시집와주지 않겠소? 부디 나와 부부의 연을 맺어주시오. 사나이 필생의 부탁입니다. (상권, p.141)
세상살이의 모진 어려움을 꾹 참고 견뎌낸 끝에, 마침내 검을 움켜진 그 순간 과감하게 싸울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난부 무사의 영예이니라.
결코 빈천과 부귀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다운 자, 그 중에서도 무사다운 자, 사내대장부다운 자의 가치는 한마디로 내명의 용기에 달린 것이니라. (상권, p.221)
아비는 그때 똑똑하게 알았다. 나의 주군은 난부 나리님이 아니었어. 조장님도 아니었어. 너희야말로 나의 주군이었다. 아비는 그때 그것을 똑똑하게 깨달았다.
왜냐, 나는 너희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느 때든 목숨을 버릴 수 있었으니. 어떤 각오도 필요 없이, 무사도니 대의 따위 필요 없이, 너희가 죽으라고 한다면 아비는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었으니. (하권, p.101)
그 무렵에는 사무라이가 제 본분을 잊고 있었어. 사내가 사내인 것을 잊어먹고 있었어. 남의 윗자리에 앉은 사람이라면 말요, 한 집안의 가장이건 번주건 쇼군이건 반드시 그 아랫사람을 지켜줘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가신들을 팽개치고 에도로 내빼버린 쇼군보다 처자식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요시무라 선생이 훨씬 더 훌륭하다고 봐. (하권, p.258)
한 소리 자꾸 또 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도쿠가와 편을 들었던 게 아뇨. 도바 후시미에서 전세가 좀 불리할 것 같으니까 수하 군사를 내동댕이치고 에도로 내빼버린 그런 쇼군 가에 무슨 잘난 충의를 내세울 게 있어? 그저 천왕을 떠메고 나서서 천하를 독차지하려는 사쓰마 조슈를 도저히 봐줄 수 없었을 뿐이야. 게다가 비겁한 도쿠가와 쇼군을 대신해서 죽을 애를 쓰신 아이즈 나리만 애매하게 악역을 도맡은 것도 참을 수가 없었지. (하권 p.280)
그렇다면 다음으로, 시즈를 아내로 맞아들인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건 대답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시즈는 농사꾼 출신에 몸도 약했지. 그러나 네가 사랑한 여인이다. 사내란 제 아내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힘이 나지 않는 법이야. 하물며 시즈는 예쁜 자식을 셋이나 낳아주지 않았더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 (하권, p.308)
이 책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아주 잘 만들어져서 상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책의 그 절절함은 좀 덜했지만, 에도 막부 말기의 여러 사회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서사야 말할 것도 없고.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요시무라 간이치로가 영화에 떡하니 있어서 반가웠다.
낮에는 팬티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야쿠자 두목으로 이중 생활을 하는 재미있는 만화가 있는데 원제는 <시즈카나루 돈>이고 울나라에서는 <보스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여기 주인공이 곤도고 신센구미의 대빵이다. 신센구미의 여러 주인공들이 다 나온다. 오랜만에 다시 함 볼까나.
영화 <파이란>을 보고 눈물 콧물 흘리며 질질 짠 기억이 난다. <러브레터>가 원작이다. 히로스에 료코의 청순미가 돋보이는 <철도원>은 또 어떤가. <프리즌 호텔>도 즐겁게 읽었는데. 지로 할배 짱이다.
번역이 너무 잘 되었다. 원본엔 옛말일텐데, 그리고 동북 지방 사투리도 많이 나왔을텐데. 이렇게 매끄럽게 옮긴이가 누굴까 싶어 번역자를 따로 찾아 볼 정도였다. 역시 믿고 읽는 양윤옥.
서울 사는 친구 용석이가 대뜸 카톡에다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었냐고, 자기는 너무 좋다고, 영화도 재미있다고, 꼭 봐라고 추천해주었던 책입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친구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읽으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일본 역사 공부도 해가며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읽고 나서 느낀 소감과 역자 후기가 너무나 같아서 옮겨 적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일단 펼쳤다 하면 책을 놓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고급스러운 품격과 문장의 격조가 돋보이는 작품을 만나는 일은 독자에게, 작가 본인에게, 그리고 한 귀퉁이 번역자에게도 큰 축복이다. 아사다 지로의 작품을 번역한 것은 이번이 세번째, 어김없이 또 한 번의 축복으로 다가왔다.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마음속 가야금을 가장 낮은 현에서부터 가장 높은 현까지 남김없이 퉁겨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까지 쏟아내게 한 다음, 그 눈물이 어느새 삶의 고단함을 구석구석 적셨는지, 문득 깨닫고 보면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는 맑은 힘이 솟아나게 하는 신비한 재능, 아사다 지로에게 또 한 방 크게 얻어맞고 말았다. (하권, p.447)
집안의 밥벌이는 그래도 내가 하는데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내내 토자리는 내 모습이 요시무라 간이치로와 자꾸 겹쳐졌습니다. 저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주인공을 보며 그에게 감정이입을 했습니다. 요시무라가 가지고 있는 사무라이 정신이 메이지 유신과 근대 일본을 만들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사내다운 모습을 지금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니 이런 소설이 나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입버릇처럼 아름답다고 되뇌이던 그의 고향 모리오카와 그의 아내 시즈의 고향 시즈쿠이시도 찾아보았습니다. 이와테 현이었습니다. 만화 <리틀 포레스트>의 배경도 이와테현 오슈라고 했습니다. 급 땡깁니다. 일본에 살았을 때도 동북 지역은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책에 요시무라의 막내 아들이 교수를 은퇴하고 완행열차로 도쿄에서 모리오카까지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저도 느릿느릿한 열차를 타고 창 밖의 경치를 구경하며 그렇게 요시무라의 고향인 모리오카와 시즈쿠이시까지 가보고 싶네요.
아사다 지로는 정말 귀신 같은 글 솜씨를 지녔습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칼 솜씨에 비견할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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