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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모비딕, 그 매혹적인 자유로움에 대한 찬가 : 허먼 멜빌 <모비딕>

by Keaton Kim 2021. 3. 22.

 

적도에서 먹이를 섭취하는 일이 한창일 때 적도에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견디기 어려운 권태와 더위를 피해 북해에서 여름을 보내고 방금 돌아온 참이다. 잠시 적도의 산책길을 어슬렁어슬렁 오르내린 뒤에는 서늘한 계절을 기대하고 동방의 바다로 떠나서, 또다시 찾아올 더위를 피한다. (p.475)

 

 

 

 

Q. <모비딕>은 허먼 멜빌의 대표작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고전소설입니다. 나다니엘 호손은 이 책을 두고 현대판 <오딧세이아>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A. 어릴 때 문고판으로 백경을 읽은 적이 있다. 고집쟁이 외다리 선장과 거대한 하얀 고래와의 사투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다. 영화도 봤다. 거친 바다의 사나이들과 전투력 만랩의 고래가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드디어 완역본을 읽는다는 기대감이 하늘을 찔렀다. 이 어마어마한 두께라니, 투지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기대와는 달라졌다. 이건 뭐 고래 백과사전이 아닌가. 원래 이런 책이었나? 외다리 선장과 고래가 한판 붙어야 하는데, 그넘의 모비딕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모비딕 나오길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전체 135장에서 133장에서야 모비딕은 모습을 드러냈다. 더우기 외다리 선장은 그 오만함에 전투력이 제법 센 줄 알았는데, 모비딕의 한합에 날아가버렸다. 헐.

 

 

Q. 1851년 멜빌이 서른 한 살에 <모비딕>을 발표하고 그가 일흔 두 살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미국에서 고작 3200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허먼 멜빌이 재평가를 받으면서 이 책은 명작 중의 명작 반열로 올라섰고, 수많은 철학자,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 책의 어떤 점이 고전이자 명작으로 평가받을까요? 

 

A. 나도 그게 궁금하다구. 고전이라 해서 잔뜩 기대를 했어. 이 책을 읽느라 12시간 정도를 소비했는데, 뭐 반전도 없고, 솔직히 읽는 시간이 아까웠던 순간도 있었어. 그래도 굳이 찾아보자면, 중간에 나왔던 고래학 부분? 이슈메일과 퀴케그와의 브로밴스? 스타벅의 합리성? 선장 에이헤브의 미친 리더쉽? 인간 사회를 완벽하게 축소시킨 배에 탄 여러 캐릭터들? 그 캐릭터들의 흥미진진한 갈등과 인간성에 대한 묘사? 마지막에 나오는 고래와 선장의 사투? 이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책을 다 읽고 다른 독후감을 찾아보니 이 책이 상징과 은유의 결정체라고 하던데, 뭐가 뭘 상징하는지, 뭐가 은유적 표현이나 사건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Q. <모비딕>은 우유빛으로 빛나는 하얀 고래입니다. 선장 에이해브는 이를 두고 '바다의 악마'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고래를 잡으러 간 사람들을 몰살시키도 합니다. 모비딕은 정말 악마를 상징하는 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하얀 고래가 악마라고? 인간이 볼 때 악마처럼 보이는 거겠지. 오히려 그 고래를 못잡아서 안달이난 사람들이 더 악마같은데. 나는 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유유히 떠도는 향유고래가 더없이 아름답더마. 소설은 에이해브의 카리스마와 모비딕의 카리스마가 격돌하는 줄거린데, 그럼 에이해브는 인간을, 모비딕을 자연을 대표하는 건가.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은유한 소설인가? 나는 모비딕이 벽같이 느껴지던데,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 인간의 오만과 위선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 에이해브를 보며 바벨탑이 생각나기도 했고. 그래서 모비딕은 신의 영역에 있는 존재같아 보였어. 멋쪄, 모비딕.

 

 

Q. 그렇다면 에이해브는 어떤가요? 모비딕에게 다리 한쪽을 잃은 선장은 복수심에 불타오릅니다. 거의 광적인 투지와 집념을 보이는 그에서 비장함마저 보입니다. 에이해브의 이런 모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여러분들은 이런 에이해브의 모습을 어떻게 보셨나요?

 

A. 에이해브는 약간 미친 사람이다. 자신의 욕망에 미친 사람. 고래를 잡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는 거의 집착이다. 피쿼드호에 탄 선원마저 파멸의 길로 이끄는 오만이다. 잘못된 리더쉽의 상징이다.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운명에 대항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정체라고? 그렇게 보는 사람은 인간의 가능성을 더 믿는 사람일까. 하긴 불가능이라고 믿고 있던 선입견을 깨부수는 건 에이해브 같은 종류의 인간이긴 하지. 예전에 읽었던 '백경'에서는 그 불굴의 투지가 멋있었는데 이젠 전혀 그렇지 않다. 젊을 때 읽었던 에이해브의 모습과 지금 보는 에이해브는 달라졌다.

 

 

Q. 책 부록에 나오는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모비딕>이 재평가 되기 시작된 초기(1920~1940년)에는 모비딕이 신, 악, 우주 같은 개념으로 상징화되고 에이해브도 거기에 맞선 인간 영웅으로 해석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엔 이 소설이 미국의 팽창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었다고 합니다. 이 견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에이해브가 극적으로 모비딕을 잡고 복수에 성공했다면 소설이 좀 더 재미있었을까? 글쎄, 나는 에이해브가 모비딕에게 당하는 장면에서 좀 어이가 없었지만,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어. 모비딕을 잡았더면 오히려 더 그저 그런 소설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피쿼드호가 소멸되는 과정을 보면서 역사적으로 정복자라 불렸던 여러 약탈자들이 얼핏 생각났어. 그 있잖아, 호주나 남미, 북미의 원주민들을 마구 죽였던 위대한 발견자들 말이야. 그래서 카타르시스 같은 게 들었을거야. 질문에 나오는 역자의 견해가 그렇다면, 나는 책을 잘 이해한 거 맞지?

 

 

이 불가사의한 고래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자유롭고 태평스럽게 마음껏 즐기고 있다. 나 역시 폭풍이 휘몰아치는 대서양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중심에 있는 조용하고 잔잔한 해역에서 장난치며 즐겁게 놀고 있다. 영원히 스그라지지 않는 고뇌가 무거운 행성들처럼 내 주위를 돌고 있지만, 나는 깊은 밑바닥과 내륙의 깊은 오지에서 아직도 기쁨의 영원한 부드러움 속에 잠겨 있다. (p.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