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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냄새로 느끼는 세상의 풍부함과 언어의 빈곤함에 대하여 :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by Keaton Kim 2021. 7. 18.

 

독일 퀼른 인근의 바헨도르프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브루더 클라우스 예배당'에 갔습니다. 미니멀 건축의 거장 피터 줌터의 작품인데요, 넓은 밀밭 한 가운데 서 있는 조그만 예배당입니다. 진흙이 섞인 전통 방식의 콘크리트 건물로 태초에 시간이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한 것처럼 들판 한 가운데 우뚝 서있습니다. 삼각형의 육중한 문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경계입니다. 그 문을 열고 '빛이 떨어지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온몸의 감각이 털이 서듯 일어납니다.

 

"헉!" 줌터 할배가 만들어 놓은 공간에 들어갔을 때 나오는 소리입니다. 오직 저 외마디 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어떤 형용사나 부사로도 설명이 안됩니다. 

 

 

 

 

 

 

 

 

 

 

저 공간을 언어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 공간에서 제가 체험한 것과 느낀 것과 감동 받은 걸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건 더 불가능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잘 되지 않습니다. 표현력의 한계, 언어의 빈곤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저런 놀라운 공간을 온몸으로 느꼈을 때, 혹은 오늘처럼 오랜 장마 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볼 때, 국카스텐의 엄청난 라이브 공연을 들었을 때, 간디학교의 마당에서 자유로움과 나른함을 동시에 느낄 때,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나만의 감정과 감동이 생깁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르누이는 세상의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천부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른 풀 냄새, 젖은 풀 냄새, 그르누이가 맡을 수 있는 냄새를 표현하기에 언어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언어가 아닌 냄새로 세상을 인지해갔습니다. 네, 언어로 우리의 오감을 온전히 표현하기엔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혹은 숨을 한번 들이쉴 때마다 그것들은 다른 냄새로 채워졌고 다른 냄새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대지, 자연, 공기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표현되고 있었다. 냄새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풍부함과 언어의 빈곤함으로 인한 그 모든 이상한 불균형들로 인해서 그르누이 소년은 말의 의미를 포기하게 되었다. (p.43)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그 유명한 <좀머씨 이야기>를 쓴 작가입니다.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학상 수상과 인터뷰를 거절하고 사진 찍히는 일초차 피하는 기이한 은둔자입니다. 내면 세계에만 몰입하며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도 그렇고 주인공도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상징의 세계를 과감하게 벗어난 인물 같습니다. 냄새로 세상을 알아가는 사람이니 당연할 겁니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으로 향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정작 자신에게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 주인공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향수에 집착합니다. 향수로 성공하여 억만장자가 된 그르누이는 예쁜 여인들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는 개뿔, 엄청난 반전이 기다립니다. 함께 즐겨야 할 여인들을 제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숭배하게 만드는 엄청난 향수를 만들어내고, 자신은 원래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책은 엄청난 흡입력으로 저를 빨아들였습니다. 정신없이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신비롭고 몽환적이고 판타지에다 스릴러가 가미된 책입니다. 뭘 읽은지도 깨닫지 못한 채 다 읽어버렸습니다. 마침 영화도 나와 있어서 찾아보았습니다.

 

모호한 책의 이미지를 보다 사실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상상했던 장면들이 당시 시대의 색을 입고 펼쳐졌습니다. 마지막 클라이막스 장면도 압권이었습니다. 좋은 원작을 가지고 그만한 작품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데, 책과는 또다른 매력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책의 결말에 대해서는 읽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인간인 저는 주인공의 특별한 능력이 부러웠고 그걸 세속의 부와 명예를 위해 쓰지 않았던 그르누이가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 주인공이 살인마에 가까웠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이 느낀다면 소설이 이처럼 명작 대우를 받지 않았겠지요.

 

그럼에도 주인공 자신만의 특별한 세계는 공감이 가능했습니다. 냄새로 느끼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언어의 세상보다 훨씬 풍부할 것이며, 인간의 악취가 없는 깨끗한 공기속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드는 것도 이해가 가능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인간의 냄세를 만드는 주인공의 욕망도요.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오감의 모든 경험을 정확하게 언어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냄새로 된 세상의 풍부함과 현실 속 언어의 빈곤함 속에서 그르누이가 말문을 닫은 장면에서 저는 단박에 주인공에게 이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책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르누이는 언어로 느낄 수 없는 자신의 세계를 무궁무진한 향기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그르누이가 아니라서 나를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빈곤함과 문장력에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고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