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외국)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 대하여 : 알베르 카뮈 <이방인>

by Keaton Kim 2018. 9. 9.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 대하여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우리 동네에서 독서대전이라는 게 열렸습니다. 채사장의 강연이 있길래 이건 빠질 수 없어~ 하고 자고 있는 딸을 깨워 함께 달려갔습니다. 무엇을 얘기할까 잔뜩 기대를 했는데, 채사장이 가지고 온 것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습니다. 헐~~ 토요일 오전에 카뮈라고? 눈이 부신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그 '이방인' 말이야? '인문학적 사유와 성장'이라는 무거운 주제임에도 채사장의 말빨을 탁월했습니다. 이 책 해석을 다하고 나서 이제 <이방인>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그 시간에 자기 책을 읽으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그만큼 소설의 해석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실제로 그의 강의가 끝나자 <이방인>을 완벽히 소화한 듯 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궁금해졌습니다. 얼른 사서 읽었습니다.

 

 

 

이 글은 채사장의 강연 내용을 기본으로 하여 제가 읽은 느낌을 간간히 넣었습니다. 제목은 수없이 많이 들었지만 한번 읽어보지 않았던 책, 채사장 덕분에 읽게 된 책,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으로 들어가볼까요?

 

 

 

 

 

 

채사장은 먼저 <이방인>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책은 1942년에 발표되었으며 장소적 배경은 카뮈가 살던 알제였습니다. 알제는 알제리의 수도로, 1830년대부터 프랑스가 침공하였고, 1860년대부터 식민통치를 한 나라입니다. 100년 넘게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 1962년 독립을 했습니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의 알제는 프랑스 식민지였고, 당시 알제의 프랑스 사람은 지배 계급이었습니다. 1%의 프랑스 사람이 99%의 아랍인을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뫼르소는 그 1%의 프랑스 사람입니다.

 

 

 

# 어머니의 죽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양로원은 알제에서 팔십 킬로키터 떨어진 마랭고에 있다. 2시에 버스를 타면 오후 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밤샘을 할 수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나는 사장에게 이틀 동안의 휴가를 청했는데 그는 이유가 이유니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첫장입니다. 엄마가 죽었는데 남 얘기 하듯 합니다. 아이고 울 엄마가 죽었대~~ 뭐 이런 대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슬픔을 느끼기보다 자기 스케줄을 챙기고 사장에게 싫은 소리를 하며 연차를 신청하고 하는 태도가 어쩐지 좀 불편해 보입니다. 장례식에 참석해서도 문지기와 함께 담배를 태우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합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내리쬐는 태양때문에 좀 성가십니다. 여하간 무사히 마치고 다음날 애인 마리와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마리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뫼르소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뜨거운 밤을 함께 보냈는데도 말이죠. 이 친구 참.....

 

 

 

# 아랍인 살해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블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뫼르소의 이웃 중에 레몽이라는 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남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해변가의 별장으로 초대받아 놀았습니다. 거기서 레몽이 좋지 않게 헤어진 여친의 형제를 만납니다. 이 아랍인들과 시비가 붙었고 레몽은 칼에 베이는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아랍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아랍인이 꺼낸 단도의 빛에 놀라 총을 쏩니다. 태양은 여전히 내리쬐고 아랍인의 몸에 네 발을 더 쏩니다. 응? 왜 그랬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잖아? 

 

 

 

# 재판의 결과

 

 

마리가 있는 쪽을 보지 못했다. 시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장이 나에게 이상스러운 말로, 나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히는 감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배려의 표시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수들은 나에게 아주 부드럽게 대했다. 변호사는 나의 손목 위에 그의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이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재판장이 나에게 무엇이든지 덧붙여 말할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없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끌려 나온 것은 그때였다.

 

 

 

살인사건이 났으니 당연히 재판이 진행됩니다. 자기의 재판임에도 뫼르소는 타인의 재판을 보는 듯이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1등 시민 프랑스인이 아랍인 하나 죽인 것은 큰 이슈거리가 아니어서, 모두들 가벼운 처벌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엄마의 장례식에 슬퍼하지 않았던 모습,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여친과 사랑을 나누고 놀았던 모습이 부각되었고, 결정적으로 왜 죽였냐는 판사의 물음에 "태양 때문이었다." 라는 어이가 없는, 그러나 솔직한 대답을 하게 합니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 마지막 장면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감옥 안에서 뫼르소는 오히려 행복감을 느낍니다. 판결이 끝나고 그는 세계와 자신이 한 형제라는 느꼈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형을 봐 주었으면 한다는 말로 소설을 끝납니다. 소설 속 내내 보여주였던 뫼르소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채사장의 강연은 티비에서만 보았는데, 실제로 보니 뭐, 별 차이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쉽게 설명해주는 그의 능력은 여전히 놀라웠다. <이방인>의 해석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다 맞는 말이다. 이방인에서 확장되는 그의 깊은 사유에 공감했다.

 

사진 출처 : https://nohji.com/3899 (이 블로그에 가면 이 날 들었던 채사장의 강연을 다시 들을 수 있다. 이걸 다 녹음해서 올리다니.... 블로그의 주인장도 대단하다.)

 

 

 

그는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이며 한 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 놓지 않는 태양을 사랑한다. 그에게 일체의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뿌리가 깊은 정열이 그에게 활력을 공급한다. 절대에 대한, 진실에 대한 정열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직 소극적인 참으로 존재한다는 진실, 느낀다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 진실이 없이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그 어떤 정복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카뮈가 평가한 뫼르소입니다. 자신이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가장 솔직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카뮈의 작품을 해설한 그의 친구 샤르트르는 "사제와 사도들이 오기 전의 사람이다." 라고 뫼르소를 평했습니다.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선과 악의 구분이 생겼고, 사제와 사도들이 오기 전이라는 건 그 구분이 없는 시절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책에 나오는 뫼르소가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과 악, 도덕, 가족, 한국인, 남자, 아버지, 가장 등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상징으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그런 곳에 태양의 세계에서 온 뫼르소가 있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대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상징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엄마가 죽으면 슬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태양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다르죠. 상징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뫼르소는 사형을 받지만 그는 존재하는 것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는 좀 달라 보입니다. 특히나 동양적인 사고 방식, 부모에게 효도하고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그런 사고를 가진 내가, 엄마 장례식에 전혀 슬프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마리와 관계를 갖고, 질 나쁜 친구 레옹이 여친을 혼내주는 것을 돕고, 결정적으로 태양의 뜨거움 때문에 방아쇠를 당긴 뫼르소에게 호감이 갈 리 만무합니다. 절마 저거~~쯧쯧~~ 이런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근데 서양에서는 이런 인물들이 자주 나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소양 뭐 이런 거는 개나 줘버리고 오직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넘이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보았습니다.

 

 

 

근데, 이런 인물들이 100년 가까이 지난 한국 사회에 소환됩니다. 자신에 집중하고, 지금에 충실하게 사는 인물들 말이지요. 한국의 책과 방송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You Only Live Once도 이런 맥락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뫼르소나 스트릭랜드 혹은 조르바의 매력에 빠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다.

 

이런 간지나는 명언들을 많이 남겼다. 십대 사춘기의 소년이 할 수 있는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외롭다." 라는 말도 남겼다. 평생이 사춘기

 

신문보는 포스 봐라. 상남자다. 여자도 많았다고 한다. 역쉬.

 

사진 출처 : https://www.fmkorea.com/1226349818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 대하여

 

 

 

영화배우 쌈 싸먹게 생긴 알베르 카뮈는 샤르트르와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로 꼽힙니다. 채사장은 실존주의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말은 본질을 가진다고 합니다. 의자의 본질은 앉는 것, 돼지의 본질은 억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 그럼 이성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겠죠. 그래서 본질을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을 실존으로 두고 본질보다 앞선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상징의 세계 사람들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을 수없이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하고, 착해야 하고, 예쁘야 하고, 남자는 돈을 벌어야 하고, 일을 잘해야 하고.... 이런 것들에 의해 자신의 진짜 모습은 저 아래에서 숨도 못쉬고 찌그러져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들어내자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요? 나, 지금, 여기. 이 세 가지가 남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저 멀리 [태양의 세계]에서 왔는데 억지로 [상징의 세계]에서 자신을 억눌러가며 함몰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이유는 그러합니다. 이 상징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내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상징을 덜어버리라고, 함몰되어 살아가지는 말자고 합니다.

 

 

 

참 말은 쉬운데.....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진실이며, 지금을 잃어버린 삶을 사는 내가 지금을 다시 찾는 거..... 뫼르소나 스트릭랜드나 조르바가 가장 잘했던 일입니다. 내가 잘 못하는 일이기도 하구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좀 아파질라 그럽니다. 아, 채사장, 왜 이리 어렵고 본질적인 주제를 건드리나. 휴~~~ 하지만 그 덕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손에 들었고 태양의 왕자 뫼르소를 알게 되었으니 감사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