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 : 야마나 테츠시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아내에게 애인이 생겼다. 아, 생긴 게 아니라 애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그 애인이란 넘은 나도 아는 사람이다. 예전에 함께 놀러 다니고 했던 사이다. 나는 아내의 공방 일을 도와주는 친한 지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뒤로도 가끔 함께 어울렸지만 그 둘이 그런 사이인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내의 그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그넘은 내가 그리 좋아할 만한 타입의 인간은 아니었으나 아내랑 아주 친한 사이라 공방에 무지 자주 오고 해서 마주칠 일이 잦았다. 그러다 그넘의 인간성을 확인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그넘은 좋을 때만 좋은 사람이었다.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도움 받은 거는 생각치 않고 오로지 도움을 준 것만 기억하는 사람, 그래서 그 대접을 받으려 하는 사람이었다(혹시나 나의 편견이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움에 주위 사람들의 평가도 들어보니 역시나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나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자신이 섰을 때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그넘은 당신이 그 정도로 공을 들일 만한 사람이 아니며, 그넘이랑 당신이 붙어다니는 게 나는 불편하니 안만났으면 좋겠다고. 그 때 아내의 반응은 놀라웠다. 그 사람은 당신이 내 곁에 없을 때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며, 그 사건은 술 먹고 한 실수였다고. 그래서 당신이 불편하다고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아내는 말했다. 그 때 처음 알았다. 둘의 사이가 그냥 친한 지인 정도가 아님을.
그 뒤로도 아내는 그넘을 계속 만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상처 받은 일은 따로 있었다. 나보다 그넘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내가 필요로 할 때 아내는 곁에 없었다. 기쁜 일이 있어 그 기쁨을 함께 하려고 아내를 찾았을 때 아내는 그넘과 같이 있었다. 몸이 너무 아파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여서 곁에 아내가 있었으면 했을 때도 아내는 그넘에게 가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지옥이 되었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붓다는 그것을 '무명無明'이라고 말합니다. 무명이란 무지한 상태, 곧 알아채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을 알아채지 못하고 살고 있는가 하면, 자신이 여러가지 일에 사로잡혀 그것들에 쫓기며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는 여러 가지 일에 속박되어 그것들에 내몰리며 살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상태를 붓다는 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내가 '바라고 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나 이외의 누가 바라고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그것이 '내 욕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바랄 수도 있지만 바라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만을 할 수 있을 때, 곧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p.59)
멈출 수 있는 욕망이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이다. 멈출 수 없다면 그건 이미 내 욕망이 아니다. 탐욕이다. 화라는 감정은 방향이 바뀐 욕망이다. 나는 아내의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까지 아니더라도 부부의 도리는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게 내 바람일까 잘못된 탐욕일까? 나의 의지로 멈출 수 있다면 그건 진정한 나의 욕망이다. 하지만 나는 이걸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내의 애정을 바라는 것, 부부의 도리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내 탐욕이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기에 화가 나는 거고.
우리는 (자아에) 걱정이 일어날 때, 걱정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 내가 아니라 바깥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내일 시험을 봐 해서 걱정으로 잠을 잘 수 없다면, 시험(이라고 하는 바깥의 현실)이 걱정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시험 전날 시험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시험만이 원인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를 잠 못 들게 하는 것은 시험이라는 정보에 반응하여 겁을 내고 있는 (조건 지어진) 우리의 신체입니다. 몸이 각성돼 있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려고 합니다. 하지만 몸이 시험이라는 정보에 반응해 자동적으로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누가나 우리의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바깥 세계에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뭔가 불쾌한 느낌이 들 때 반사적으로 바깥 상황이나 다른 이의 행동이 원인이라고 느낍니다.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의식적으로, 머리로 판단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무의식적으로, 거의 자동적으로 몸이 그렇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리고 원인을 만들었다고 보이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의 감정을 만드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나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바깥 세계로부터의 정보에 반응하는 우리 자신의 자아, 곧 정신과 몸의 복합체입니다. 그것을 알아채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반야의 지혜'입니다. (p.100~103)
아내의 애인인 그넘과 나보다 애인을 더 소중히 여기는 아내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 대상(사람과 태도)때문에 화가 났는데 이건 자동적으로 그렇게 판단해서 그런거란다. 실제로 애인이 있는 아내를 가진 남편이 모두 화를 내는 건 아니다. 화를 안내는 남편도 있을 것이다. (음, 그럴까? 그럼 바로 부처다.) 화를 내는 건 그런 바깥 세계의 현상에 반응한 내 자신이다.
우리의 화나 기쁨이나 슬픔은 모두 최종적으로는 '나'로부터 나옵니다. 일어납니다. 바깥의 일들은 우리의 감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나'가 주체입니다. '나'에 변화가 일어나면 무엇에 화를 내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기뻐할 것이냐 하는 바깥 세계에 대한 나의 반응이 바뀝니다. '바깥을 향은 나의 반응'이 바뀐다는 것은, 결국 '바깥 세계' 자체가 바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와 '바깥'은 서로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이나 사람이 바깥 세계에서 모두 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슬픈 일 하나 안 당하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모든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보증 또한 없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모두 손에 넣을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내 뜻대로 바꿀 수 없는 바깥 세계에서밖에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면, 우리는 행복해지기 몹시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깥 세계를 바꾸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화가 일어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남의 행동이나 말이 '내게 상처를 주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적입니다. 그 행위나 말에 우리의 자아가 순간적으로 상처를 입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라는 감정입니다. 마음에 두지 않은 일에는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떤 행동이나 말도 웃으며 흘려버립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처 입는 것은, 바깥(남)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바깥 세계(남)의 가치 판단에 우리가 의존해 있고, 거기서 인정을 받거나 신뢰를 받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나 배반을 당했을 때 우리는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는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남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그때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르는 전형적인 '무명(무지)'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으로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남의 칭찬 따위를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p.108~110)
아내의 태도에 대해, 또 아내의 애인인 그넘에 대해 대한 화는 전적으로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내 감정을 바꾸어야 한다. 아내의 태도나 애인에 대해 의미를 두고 있다. 그게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면 화날 일도 없을 거다. 나는 아내나 그넘보다 더 가치가 있다. 내가 아내나 그넘보다 힘이 더 세다. 내가 훨씬 가치 있는 존재이기에 나보다 가치가 없는 아내의 태도나 그넘이 나를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 나를 화나게 할 만큼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를 무너지게 할 만큼 그것이 의미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내 존재 가치를 긍정하고 받아들이자.
구체적으로 어떤 수련을 해야 하나
흔히 잡념을 버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잡념이란 버리려고 한다고 버려지는 게 아닙니다. 머리가 제멋대로 온갖 것을 끊임없이 생각해 내기 때문입니다.
조건 지어진 사고는 대단히 뿌리 없는 논리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약속한 사람이 늦어지면 우리 머리가 제멋대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머리는 그것을 '내가 싫어진 증거'라고 여깁니다. 저 혼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고선 그 다음 주에 있는 내 생일에 그의 선물이 오지 않거나 하면 내개서 마음이 떠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해버린다거나 합니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생각나는 대로 상대를 나쁘다고 믿고, 다음에 만났을 때는 만나자마자 상태를 쏘아붙이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릅니다. 그렇게 상대로부터 공연히 미움을 사고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머리를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건 무리이기 때문에 생각을 해도 좋으나,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상에는 잡념을 없애는 훈련도 물론 있지만, 잡념이 올라오는 대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흘러가는 생각을 그저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각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하던 행동을 멈출 수 있습니다. (p.142~144)
둘이서 희희낙낙거리고 내 얘기를 지 멋대로 할 거라는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런 생각들이 올라오면 그저 놔두자. 그 생각들을 바라보자. 그런 의식에 못 박혀서 꼼짝 못하며 살아 왔음을 갑자기 알아채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호흡이 깊어지는 걸 깨닫게 된다. 들고 나는 숨에 의식을 두는 것만으로도 내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다.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 더 있어야만 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주문을 외자.
붓다의 중심 테마는 '행복'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가 찾았던 것은 행복의 노하우였지 철학도, 학문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불교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p.54)
글쓰기 선생님이신 이문재 선생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 책이다. 반야심경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이었다니. 나는 내 생애 가장 괴로운 구간을 지나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과정은 괴롭고 힘들다. 벗어나고 나면 나는 더 성장해질거라는 희망으로 버티고 있다. 그런데 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은 바깥 세계(나를 괴롭게 하고 상처 주는 일)이 소멸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부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건 단지 '색(바깥 세계, 바깥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고 말한다. 그것에 반응하는 나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중심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금 여기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다.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내 존재를 축복하는 거다. 2500년 전에 부처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고. 그걸 실천해서 부처는 깨어있는 자가 되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을 저주하며 그것이 사라지는 걸 기다리는 건 나 자신을 더 괴롭히는 일이다. 부처처럼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수련하다보면 내 머리 속에 있는 망상과 내 안의 화는 잦아들겠지. 그게 진정 나 자신을 위한 길이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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