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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이야기

나와 나의 세계가 선명해진다 : 채사장 <열한 계단>

by 개락당 대표 2020. 8. 9.

 

 

 

나와 나의 세계가 선명해진다 : 채사장 <열한 계단> 

 

 

 

하나의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우리를 먹고살게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게 하며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 삶은 너무나도 아쉽다. 우리는 노동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즐기고 여행하고 놀라워하기 위해 온 것일 테니까.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역을 모험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은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이다. (p.17)

 

 

 

그래서 채사장은 자기가 살아오면서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어줬던 책과 인물을 이 책에서 다룬다. <죄와 벌>, <성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 선언>, <티벳 사자의 서>, <우파니샤드>와 붓다, 체 게바라, 상대성 이론, 메르세데스 소사를 소개한다. 젊은 날의 채사장이 이들과 대화하며 성장한다. 그의 경험을 읽으면서 나는 감탄한다. 사색의 깊이와 해박한 지식에 놀랐고, 어려운 이론을 이토록 쉽게 풀이한 그의 글쓰기 실력에 환호한다. 유투브에 나온 그의 강의를 여럿 봤으나 역시 채사장의 정수는 책이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방대하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성숙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진리와 정의, 존재의 문제라고 한다. 그토록 이상적인 공산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답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한 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로 돌아오라는 니체의 제안이라고 설명하며 이상적이고 불변하는 세계 같은 건 없다고 단언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한 우물을 파는 전문가가 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그게 자본주의의 효율성 때문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우주의 존재 자체는 인간의 의식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라는 과학 이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국가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며,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주어진 삶의 고통을 인내하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소중한 사이일수록 떨어져 지내는 지혜가 필요하며, 내면 깊이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모두 불편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들이 나의 세계를 넓힌다는 것에는 반박할 수 없다. 

 

 

 

특히나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지대넓얕 0>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나와 세계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는 곧 나의 내면이다.'라는 주장을 넘어, 죽음 이후의 세계도 그것이 곧 나의 내면 세계라는 놀라운 내용을 소개한다. 티벳의 위대한 스승 파드마삼바바의 깨달음이다. 그러니 허망해하지 말며,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라고 충고한다. 삶과 죽음이 모두 나의 마음이라며. 아아, 이건 지혜이자 진리다.

 

 

 

 

 

 

채사장의 신작 <지대넓얕 0>을 얼마 전에 읽었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범아일여' 즉 나와 세계는 하나라는 거대한 지혜였다. 평행우주, 양자역학, 끈이론과 같은 현대에 와서 제기된 과학 이론과 맞물려 다시 생각해 봄직한 이야기였는데, 이게 이천 년 전에 지혜로운 사람들이 알려줬던 삶의 정수였다. 채사장의 이전 책이 궁금해져서 이 책을 들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흥미로왔다. 십대 후반의 채사장을 불러와 한 계단을 올라가며 성장하는 이야기 전개도 그러했지만 이야기 자체도 놀라웠다. 

 

 

 

사람들의 지혜를 이렇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책은 처음이다. 채사장이 보여주는 인문학, 즉 보편적인 진리는 결코 어렵지 않다. 차라투스트라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공산당 선언의 깊은 의미도 느꼈으며 바르도 퇴톨과 메르세데스 소사를 만났다. 읽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의 지식들이 제자리를 찾아 배열되는 기분이었다. 

 

 

 

책머리에 함께 이 계단을 오르다 보면 문득 놀라운 곳에 당도해 있을 거라고 한 저자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마주했던 내 삶의 본질적인 질문에 이 책을 통해 다시 끄집어내어 상기한다. 그리고 인류가 탄생한 후 과거에 명멸했던 많은 사람들이 남긴 삶의 정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나의 이 짧은 생애에 그들의 지혜를 얼마나 맛볼 수 있을지도 나에게 묻는다. 그리하여 내가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를 바란다. 

 

 

 

작가를 따라 열한 계단을 다 오르니 진한 여운이 남는다. 여운을 삭이려 잠깐 쉰다. 나는 여기에 여행하며 즐기고 놀라워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럴려고 여태 달려왔던 길을 멈췄다. 이제 둘러보니 나 혼자다. 그래도 괜찮다. 나와 내 마음이 만든 세계가 조금 선명해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