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모모는 안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1. 김만준의 노래 <모모>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개짓하며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김만준 <모모> 1978 전일방송 대학가요제 대상
혹시나 하고 검색을 해봤더니, 역시나 였습니다. 어릴적 귀에 익은 노래 '모모'가 이 소설 속 주인공 모모인가 하구요. 어떤 이는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가 그 모모라 하기도 하는데요, 저는 역시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가 그 모모 같습니다.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는 걸 모모가 알고 있다'는 가사에서 바로 필이 왔습니다. 무려 40년 전에 이 책을 읽고 그 느낌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고 그 노래를 내가 중얼거리며 자랐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리고 열네 살 소년 모모가 알고 있었던 사실을 나는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에 더 놀랍니다.
# 2.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 로맹 가리의 짤막한 유서의 마지막 문장
잘 알려진 대로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의 다른 이름입니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 콩쿠르 상을 수상했고 1975년에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으로 두번째 수상을 합니다. 한번 수상한 작가에게는 절대 수여하지 않는다는 이 상을요.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였다는 사실은 1980년 그가 죽은 후 유서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프랑스 문단의 스타였던 그가 자신을 씹던 모든 비평가들에게 주먹 감자를 날린 셈이죠. 하늘에서 로맹 가리는 통쾌하게 웃었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씁쓸했을까요? 궁금해집니다.
책 말미에 조경란 소설가의 해설에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새 이름을 만든 것은 그에게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며 모든 기회를 다시 한번 갖게 하는 기회였다고 말합니다.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해 외롭게 성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공군으로 전쟁에도 나갑니다. 마흔 다섯에 당시 스물한 살의 헐리웃 스타 진 세버그와 세기의 사랑을 나누기도 합니다만, 그녀가 마흔 한 살의 나이로 자살한 일 년 후 자신도 입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겨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로맹 가리의 일생을 따라가며 그가 전쟁 영웅으로 외교관으로 다이나믹한 생을 살았지만 이면에는 외롭고 쓸쓸했으며 여성에 대한 편력 또한 화려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삶에 가장 중심이 된 것은 글쓰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글쓰기 말이죠. 굳이 그의 유서 마지막 문장을 옮긴 까닭입니다.
세기의 사랑을 나눈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
실제로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이라는 책도 있다. 미모가 엄청나시다. 잘 좀 사시지.....
사진 출처 : https://brunch.co.kr/@roh222/76
# 3. 맹랑한 열네 살 소년 모모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p.120)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p.152)
젊은 창녀들에게는 포주가 있지만 늙은 창녀들에게는 아무도 없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늙은 창녀들만 맡고 싶다. 나는 늙고 못생기고 더이상 쓸모없는 창녀들만 맡아서 포주 노릇을 할 것이다. 그들을 보살피고 평등하게 대해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경찰과 포주가 되어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 아파트에서 버려진 채 울고 있는 늙은 창녀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p.153)
"그렇지 않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넌 너무 어려서 이해를 못하겠지만....."
"선생님,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p.271)
# 4. 모모가 어른이 되어
요런 맹랑한 녀석을 봤나. 모모는 창녀들이 낳은 아이들을 돌봐주는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사는 열네 살 소년입니다. 자기가 열 살 꼬마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진 냥반이 등장해서 하루 아침에 열네 살이 되어버렸습니다. 열네 살 치고는 너무나 맹랑합니다. 늙은 창녀를 보살피는 포주가 되겠다고 하다니요.
맹랑한 녀석이지만 따뜻한 녀석이기도 합니다. 열네 살에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소년입니다. 하밀 할아버지가 들려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봐준 로자 아줌마의 사랑을 느끼고 늙고 병들어 제 몸을 가눌 수 없는 로자 아줌마의 곁을 지켜준 것도 모모입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사랑을 줄 상대가 있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항상 배가 고프고, 늘 누추한 곳에 살지만, 모모 앞에 놓인 생은 행복합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요. 모모는 아마도 잘 자랐을 겁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신과 다른 이를 사랑하고 사랑 받을 줄 아는 꽤 훌륭한 어른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는 사랑을 하면서도 늘 사랑에 목말랐던 에밀 아자르에게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한마디 했을지도 모르죠.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다고 모모는 말합니다. 무얼 하기에 너무 늦은 경우도 결코 없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소설 (외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가 놀라운 삶인가? :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0) | 2018.02.09 |
---|---|
오롯한 나로 겨울이 되고 당신과 더불어 봄이 된다 : 밀란 쿤데라 <정체성> (0) | 2018.01.24 |
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세계와도 같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0) | 2017.08.31 |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한다는 건..... :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0) | 2017.06.03 |
위대한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가?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0) | 2017.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