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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세계와도 같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by Keaton Kim 2017. 8. 31.

 

 

 

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세계와도 같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은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p.33)

 

 

 

책읽기와 고전문학의 세계가 자신의 전부인 그레고리우스는 어느날 자살을 시도하는 포르투칼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자신이 여태 만들어온 모든 것을 버리고 리스본으로 떠납니다. '포르투게스'라는 낯설지만 묘한 친근감이 있는 단어의 울림과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의사의 책 한 권을 손에 든 채 말이죠.

 

 

 

그레고리우스는 지난 몇 십년 동안 대학에서 고전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늘 같은 시각에 출근하고 수업을 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하고, 또 그가 다루는 세계는 완벽해서 학생들에게 문두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던 그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그의 완벽한 일상을 깨고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리스본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여인이 남기고 간 책의 저자 '프라두'의 행적을 따라갑니다. 프라두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흔적을 쫓습니다. 프라두를 기억하는 거의 모든 이들을 만나며 치열하게 그리고 정열적으로 살아간 프라두의 생애를 온 몸으로 느끼며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변화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갑작스럽게 자신만의 견고한 일상에서 탈출한 까닭은 무얼까요? 그의 탈출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그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의 현실에 충분히 만족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자신이 알지 못했지만 그의 무의식 아래에 어쩌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갈망, 자유를 향한 욕구,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나는 흐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게 자그마한 불쏘시개로 활짝 터져버린 것입니다.

 

 

 

그가 낯선 리스본에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세계를 만납니다. 여태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즉 완전히 다른 사람의 삶을 접하면서 그는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그레고리우스의 심경의 변화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는 않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고향 베른은 여태 자신이 알고 있던 베른과는 전혀 새로운 베른이었고, 자신이 알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행 전과 여행 후의 그레고리우스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심연에 어떤 새로운 세계가 숨어있는 지 대부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테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레고리우스처럼 사소한 우연을 계기로 그것을 발견하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 우연은 여행일수도, 일탈일수도, 아니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일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고 곧바로 영화도 봤다. 영화는 매끄러웠지만 책의 깊은 맛은 덜했다. 다만 책에서 나왔던 리스본의 다양한 장소 - 그레고리우스가 묵었던 호텔, 그가 걸었던 좁다란 골목의 풍경과 계단, 주인공이 살던 집들과 그 이색적인 모습들 - 를 실제 영상으로, 책과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 죽음의 경고)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게 무엇인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기. 나중에도 언제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고치기. 메멘토(경고)를 안락함과 자기기만과 꼭 필요한 변화에 대한 불안데 대항할 도구로 사용하기. 오래 꿈꾸어오던 여행하기. 이런 언어를 배우고, 저런 책들을 읽기. 이 보석을 사고, 저 유명한 호텔에서 하룻밤 묵기. 스스로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여기에는 더 큰 일들도 속한다. 좋아하지 않던 직업을 그만두고, 싫어하던 환경을 떠나기. 더 건실해지고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일들을 하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변에 누워 있거나 카페에 앉아 있기, 이것도 메멘토에 대한 대답이다. 지금까지 일만 해온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

 

 

 

"네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기억해. 어쩌면 내일일지도 몰라."

"내내 그 생각을 해서 직장을 빼먹고 햇볕을 쬐고 있는 거야." (p.447)

 

  

 

그레고리우스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온 후, 그의 변화된 모습과 다른 일상이 궁금하지만 책은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상하는 독자의 몫입니다. 다시 학교에 복귀할 수도 있고 다른 새로운 시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혼한 아내와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이미 이전의 그레고리우스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단 한 번의 우연으로 리스본을 찾았고, 그 우연에 운명을 맡길 용기가 있었습니다. 아마데우의 인생을 들락거리며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세계를 보고야 만 것입니다.

 

 

 

내 안에도 수 많은 내가 있습니다. 내가 경험한 나는 아직 일부입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세계가 내 안에 있으며 어떤 계기로 나는 그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은 열려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위에 인용한 메멘토에 대한 해답에 대해 항상 깨어있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우연을 삶의 전환점으로 만들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나에게도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우연이 찾아들길 기대합니다.